20200211
나에겐 두 살 어린 동생이 있다.
'어린'의 형용사보다 '미혹되지 않는' 나이에 가까워졌지만 내겐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 웅이.
내 나이 여덟 살에서 아홉 살로 넘어가던 때 나와 동생은 외할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 후 몇 년을 엄마와 대구에 살다가 외삼촌네인 서울에 살다가 또다시 시골에서 살다가를 반복했다. 열 손가락 가득 꼽을 이동 속 변하지 않는 건 오로지 눈썹이 새카만 우리 남매 사이의 거리뿐이었다.
얼마 전, 설 new year에 엄마와 동생네 부부와 함께 집에서 식사와 술을 했다.
출산 후 처음 갖는 가족 모임에 왠지 모르게 두근대던 밤이었다.
우리 가족, 우리 가족의 가족, 그 모두가 그저 우리 가족.
몇 잔의 술잔이 오간 뒤 동생은 초등학교 입학식 이야기를 꺼낸다. 매번 술자리에서 나오는 레퍼토리다.
"난 초등학교 입학식도 혼자 걸어서 갔잖아."
여덟 살 아들의 첫 학교 입학식을 함께 하지 않은 엄마의 무심함과 방목적 육아에 대한 문책이다. 동생의 마음속 어딘가 남아있는 여덟 살 아이가 던지는 반격이다. 옛날 일을 자주 언급하지 않는 동생이 몇 번이나 이야기 한 걸 보면 꽤나 마음에 속상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등교는 집 앞 도 아닌 30분 이상을 걸어야 했던 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어린 아들을 혼자 보낸 엄마의 마음이 마냥 편했을까. 엄마가 되어보니 괜히 되어보는 입장의 자리가 늘어난다.
"그리고 난 '누구 때문에' 한참 동안이나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학교를 다녀야만 했지. 애들이 놀릴까 봐. 선생님이 네 머리 왜 그러냐고 할까 봐."
오늘은 웬일인지 곧 나에게로 화살이 향한다.
그 시작은 이렇다.
동생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우린 할머니와 셋이서 살았다. 그때 엄만 가끔 우릴 보러 찾아왔는데 하루는 마당 평상에 앉아 동생 머리를 엄마 무릎에 눕히고 일명 '씨가리(머릿니)'를 골라줬다. 요즘엔 머릿니를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의 그곳은 아직도 우물물이나 펌프질로 물을 끌어올리는 곳이었으니 위생이 좋았을 리 없다.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이라 함은 우물물을 길어다 몇 번이나 주전자로 물을 데워 빨간 다라이에 몸을 잠깐 담그는 걸 말했다.
어쨌든 원숭이처럼 아들의 머리를 골라주던 모습에 나는 생각했던 거 같다.
'뭔지 몰라도 엄마가 돌아가면 내가 웅이한테 해줘야지.'
엄마가 대구로 돌아가고 난 틈만 나면 동생의 머리를 내 무릎에 뉘었다. 사실 세세한 기억은 없다. 사진처럼 몇 장이 머릿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엄마의 무릎 위 누운 동생의 모습 한 장, 내가 동생의 머리칼에서 씨가리를 찾는 기억 한 장, 정수리가 훤히 보이도록 머릿털이 뽑힌 동생을 보고 외할머니가 "아 머리가 와이래여(애 머리가 왜 이래)!"하고 역정을 내던 얼굴 한 장, 동생이 나를 지목하자 "아이다, 너거 누나는 아일기다."라는 할매의 한마디.
그렇다. 할머니의 기대엔 미안하지만 동생의 정수리 부분의 머리카락 뿌리를 쑹텅쑹텅 뽑았던 건 나였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게 씨가리인줄만 알았다.
동생의 나이 일곱, 내 나이 아홉의 사건.
맹세한다. 난 정말 조그맣고 동그란 머리 뿌리가 씨가리인지 알았다. 이제 와서 구글로 찾아본 씨가리는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너무나 확연히 벌레의 모습이지만 어린 시절 내 눈의 그것은 아주 쪼그마한 하얀 알갱이였고 머리 뿌리 역시 그랬다. 아니, 애초에 머리 뿌리란 게 뭔지도 모를 정도로 무지한 때였다. 하지만 모든 건 지금에 와서 하는 변명일 뿐이다. 분명 동생은 아파했을 텐데 머리가 휑뎅그렁해질 때까지 한 나는 얼마나 나쁜 누나인가. 그리고 그 머리로 초등학교에 입학을 해야 했던 동생은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숨기려 내내 모자를 뒤집어쓰고 얼마나 날 원망했을까.
그러나 여전히 못된 누나는 어색한 분위기에 괜히 애먼 탓을 한다.
"왜 머리를 빡빡 깎지 않았어?"
하지만 사실은 그 말이 동생의 입에서 떨어진 순간부터 다음날까지 내내 그 생각만 했다.
왜 그랬을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난 왜 그랬을까.
누구보다 사랑한 동생에게 왜 그런 힘든 경험을 갖게 했을까. 온종일 마음이 한여름 털옷을 입은 듯 답답했다. 그리고 결국 그날 밤, 문자를 톡톡 써 보냈다.
-미안하데이.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다.
니한테는 정말 큰 상처였겠다. 미안하데이
동생이 그 기억을 지고 온 시간과 무게에 비해 내 사과는 너무나 가볍다.
-농담이었는데.
-농담인 건 아는데 그래도 얼마나 힘들었겠노.
경상도 남매의 짧은 화해법이다. 말은 너무나 단순해 내 진심을 조금도 꺼내 보일 수 없다. 이래서 사과는 눈을 보고 해야 하나 보다. 눈이라도 열어 내 마음을 보여야 하나보다.
나의 사과가 제자리를 찾는 동안 몇십 년이 지났다. 그날의 우리 나이에 우리 자식들이 더 가깝고 우린 그때 엄마의 언니, 오빠 나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때의 엄만 서른도 안되었었지.
내 딸은 두 살, 동생의 아들은 네 살.
어쩌다 보니 딱 두 살 차이다.
우리의 일곱 살, 아홉 살 과거는 이들의 오 년 뒤 미래가 되었다.
아이들은 어떤 서로의 기억을 만들어갈까. 잘은 몰라도 그중에 씨가리에 관한 건 없을 게 분명하다.
나에겐 두 살 어린 동생이 있다.
아니,
나에겐 두 살 어린 동생과 그의 부인, 그의 아들이 있다. 거리가 먼 탓에 자주 볼 수 없어 안타깝지만 그들의 존재에 그저 감사하다.
우리 범탱이(어릴적 내가 지어준 별명),
범탱구리(역시나 별명).
너와 네 가족 모두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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