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접니다만
난 종합병원이 싫다.
주차장은 쇼핑몰같이 복잡한 주제에 정작 쇼핑몰이 가진 쾌활함과 여유, 미소(영업 미소 포함)는 아기 손톱만큼도 보기 힘들다. 물론 나의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쇼핑할 땐 마냥 팔랑거리던 두 발과 마음이 병원에선 고장이라도 난 듯 대기실 복도 위를 삐그덕 삐그덕 댄다.
아니다. 모두 변명이자 거짓이다.
그곳이 싫은 이유는 그저 파란색에 가까운 하얀 수술실과 차가운 금속 침대가 떠오르는 탓이다.
거의 일 년 만에 대학병원을 찾았다. 정확히 말하면 1년을 훌쩍 넘긴 18개월 만이다. 보통 암은 5년 동안 발병하지 않아야 완쾌로 인정되는데 나의 경우는 사이사이 이상세포가 생긴 탓에 병의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4개월마다 추적 검사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신하고선 이상세포가 생긴다 한들 할 수 있는 치료가 없고 출산 후엔 말 그대로 아무 생각이 없었기에 갈 생각도 못 하고 살았다.
그 시간이 딱 1년 6개월이다.
그러다 아기를 낳고 동네 산부인과에서 의무적으로 하는 정기 검진에서 세포 이상 소견이 나왔다. 출렁, 가슴속이 뻐근하도록 풍랑이 인다. 저 멀리 집어던지고 까맣게 잊어버린 아산병원 전화번호를 다시 더듬는다.
망각했던 차갑고 날카로운 감각이 깨어난다. 스멀스멀 겁이 고개를 내민다.
난데없이 찹쌀떡 군이 사준 차가버섯 약과 엄마가 보내준 브라질너트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모든 병은 면역력의 문제 아니던가.
처음 병원에서 진단받은 날, 의사는 말했다.
"세포 변형이 시작되긴 했지만 일반적인 면역력으로 이 정도는 시간이 지나면 낫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번 진료에 상황도 말도 바뀐다.
"점점 악화되고 있군요. 빨리 수술해야겠습니다. 아니면 자궁을 덜어내야 해요."
내 면역력이 일반적인 것에 속하지 않은 탓이다. 면역력, 고 까짓 게 도대체 뭔데 사람을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만드는지. 어린 시절 입 주위 늘 달고 살던 포진도, 호주에서 갑자기 생겼던 피부병도, 매년 빠진 적 없는 감기도 내 평생 모든 병의 원인은 면역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자궁경부암'의 악화라니. 빌빌한 잽을 치던 면역력이 어퍼컷을 날린 셈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궁경부암이 시작되던 때 시기적절한 몇 번의 수술로 몸이 금세 나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감사하게도 우리 아가를 품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이번은 임신 이후 첫 이상세포의 발생, 면역력 악화의 반격인 셈이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선 잘 자고 잘 먹고 운동해야 한다고들 한다. 벼락치기의 영양제나 운동도 먹힐진 미지수지만 별 수 있나. 브라질너트를 한 알 더 털어 넣고 갑자기 스트레칭을 한다.
(물론 모든 게 면역력 탓은 아닐 겁니다만)
한동안 가지 않은 대학 병원을 다시 예약하기 위해선 다섯 달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큰 병원인만큼 예약 계단도 긴 모양이다. 아기가 성장하는 동안 다섯 달이 5주처럼 지나갔다. 작년 10월의 전화 예약 후 잊어버렸던 진료 일은 생각보다 금방 찾아왔다.
전날에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빨개진 눈이 흐리멍덩한데도 심장은 너무나도 빠르게 뛰었다. 집을 나서고 진료받는 순간까지 혹, 누가 내 요동치는 심장을 들을까 내내 부끄러웠다.
진료 전, 병원 근처 유명한 빵집에서 찹쌀떡 군과 늦은 아침을 먹었다. 마음을 가볍게 털어내기 위함이다.
"나 한 시간마다 잠에서 깼어. 그런데 모든 꿈이 악몽이었어. 꿈에서 의사가 그러더라고. '이제 당신은 얼마 살 수 없습니다.' 순간 우리 찰떡이가 번뜩 생각나는 거야. 우리 아가 엄마 없으면 안 되는데, 내가 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살아야 하는데, 막 그런 생각이 들어서 꿈에서 엉엉 울었어."
정말이다. 두려움이 만들어낸 꿈이 너무나 생생했던 탓에 잠에서 깨고서도 한참을 마음을 달래야 했다.
긴장한 고양이처럼 손바닥이 촉촉해진 내 손을 잡고 그는 말한다.
"원래 꿈은 반대라잖아. 그리고 그냥 자기는 차 정비소에 정기검사받으러 가는 BMW 520이라고 생각해. 시기 맞춰서 엔진오일도 갈고 잔고장 있나 확인하고. 차도 사람도 똑같아. 더 건강하고 무탈하기 위해서야."
차를 좋아하는 사람답게 비유도 차車스럽다. 병원 대기실에 조르륵 앉은 사람들과 정비소 앞 줄지어 선 차들이 머릿속에서 교차 편집된다. 근데 갑자기 웬 520.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좋은 차를 얘기한 거겠지. 귀엽게도.
"그럼 나는 BMW 520 말고 마세라티로 할래. 난 마세라티야."
어차피 말도 안 되는 거 이왕이면 더 좋은 차나 돼보자 싶었더니 갑자기 그의 표정이 진지하다.
쓸데없는 데서 단호한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흠.(잠시 생각) 그럼 할부 많이 낀 마세라티로 하자."
아, 네. 알겠습니다. 굳이 반박하지는 않는다. 할부를 껴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 거 아니겠어. 마세라티가 마세라티지 뭐. 그렇게 할부 많이 낀 마세라티는 신랑 손을 잡고 병원에 다녀왔다. 그게 월요일의 일이다. 검사 결과는 원래 일주일 후에 나오지만 경험상 보통은 그보다 2-3일은 빠르게 나온다는 걸 안다. 날 빤히 바라보는 아가를 앞에 두고 스피커폰으로 검사 결과 ARS를 확인했다. 주민번호를 누르면서 괜한 두근거림에 작은 아가 손을 꼭 잡는다. 그러고 보면 아직 혼자 앉지도 못하는 요 자그마한 사람에게 난 늘 의지하고 기댄다. 어두운 밤 새근거리는 말간 얼굴과 포동한 손에 안도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신원확인 후의 1,2초 정적이 길다.
"2020년 2월 10일에 한 자궁암 검사 결과는 '정상'으로 판정되었습니다."
아. 아아.
며칠 동안 가슴 깊숙한 곳에서 거칠게 일던 풍랑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두 눈을 감고 주문을 외듯 세 번 반복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받는 이 없는 내 기도는 잔잔한 안도로 침잠한다.
다음 검진은 6월이다.
등나무가 보랏빛 꽃을 피워낼 즈음, 우리 아가는 이사 간 우리 집을 기어 다닐 즈음이다. 어쩌면 벽을 짚고 조심스레 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다음은 아장아장 여태 한 번도 땅을 디뎌본 적 없는 보드라운 발로 모래사장을 걸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은 우리가 먹는 밥도 같이 먹고. 또 그다음은 기린 놀이터에 가서 미끄럼틀도 타고 그네도 타고. 또 그리고 그다음은...
아가가 그렇게 제 속도로 성장하는 동안 한동안 난 네 달씩 이어지는 릴레이 같은 추적 검사를 받을 것이다. 오랜 마라톤을 함께 뛰기 위한 잠깐의 릴레이인 셈이다.
좋다. 그러기 위해선 병원에 대한 나의 호오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마라톤을 뛸 수 있는 지구력과 건강.
내 가족을 곁에서 지킬 수 있는 지구력과 비실대는 면역력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건강.
건강하자. 아니 난 건강하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갑자기 궁금하다.
날 BMW 520이라 말한 그는 우리 아가는 뭐라 말할까?
차를 잘 모르긴 몰라도 작고 통통하고 세상 귀여운 그런 차가 이 세상에 있을까.
어디 한번 물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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