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삭 사과 소리가 나는 옥수수, 20200621
단정하게 빗어 내린 아가의 옅은 금갈색 머리칼처럼
노오란 옥수수 알갱이들이 가지런하게 줄을 서서 몸을 부대낀다.
'야, 옆으로 가봐.'
'밀지 마. 나도 간신히 매달려 있어.'
'아이참'
'우와, 근데 넌 엄청 노랗다. 같은 햇볕 아래 아니었어?'
'훗, 내가 고개를 좀 내밀었지.'
쨍알 쨍알, 쨍알 쨍알
한 알갱이가 한 마디씩만 해도 그들의 수다는 끊이지 않겠지.
상주 할머니가 병원이 아닌 그녀의 집, 이미 십 년 전 허물어져 거대한 펜션이 들어선 그 자리에 살던 때, 너른 마당 맨 뒤는 늘 키 큰 옥수수 차지였다. 내 어린 시절 할머니 집 화장실은 아직 푸세식이었는데 툇마루를 지나 족히 몇십 걸음은 걸어야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달랑이는 알전구 하나로 밤일을 보기엔 어둠 속(아마도 내 머릿속) 미지의 괴물이 가득했다. 그 시절에도 요강은 흔히 쓰는 물건이 아니었지만 별 수 있나. 몸을 쪼그려 엉덩이보다 크던 요강에 매 밤 볼일을 봤다. 새벽이면 할머니는 늘 요강을 텃밭에 뿌리는 일과로 시작했는데 처음 그 뜨악한 광경을 보고는 다짐했다.
"뭐꼬. 난 절때로 여기서 딴 거는 안 먹을 기다."
물론 그 마음은 한여름 매미소리 아래 잘 삶아진 옥수수와 복수박의 등장으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올해 첫 옥수수를 샀다.
달다고 소문난 초당 옥수수다. 일명 '사카린'이나 '설탕'을 넣지 않아도 단 맛이 좋다니, 안 살 이유가 없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삶는 것보다 15분 정도 찌는 게 더 좋다는 의견이 많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집단지성에 의지하는 게 맘 편한 일이다. 찜기에 익혔더니 설익은 듯 아닌 듯 작은 알갱이들이 톡톡 터진다. 이게 맞는 건지 아닌 건지 달달탱글한 맛에 계속 터트려 먹는다.
"이건 옥수수라고 하는 거야."
아윤이에게 아가 얼굴보다 길쭉한 옥수수를 건넨다. 조몰락조몰락 요리조리 살피더니 이내 입으로 직행이다. 그건 놀랄 일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이미 80년도 전에 작고했지만 그가 남긴 '구강기'는 여전히 모든 아기들에게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두 손으로는 옥수수를 고정하고 여덟 개 난 하얀 이로 옥수수 끝을 문다.
"앗, 안돼!"
먹는 데선 선수다. 오물오물, 옥수수 대를 베어 물고 야무지게 씹고 있다. 아윤이에겐 옥수숫대와 옥수수의 차이가 없다. 아마도 단지 식감과 당도의 차이일까, 모두 먹는 거란 데는 변함이 없다. 내 무지를 탓하며 수확하듯 한 알 한 알 정성스레 따서 동그만 파란 쟁반에 둔다.
하나를 두면 하나를 냠
두 개째 두면 두 개를 냠
세 개째 두면 세 개를 냠
네 개째 두면 네 개를 냠
다섯 개 두니 다섯 개를 냠
씹지도 않고 입안 가득 하나씩 넣더니 결국은 다람쥐처럼 양 볼 가득 빵빵해졌다. 어디 더 해볼까?
여섯 개째 냠.
작은 입 한가득 노오란 옥수수 알갱이들이 밀리지도 터지지도 못하고 대공황에 빠진 찰나,
일곱 개째 쏘옥.
결국 혼잡을 버티지 못한 옥수수 알갱이들이 후두둑, 아가 입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오늘의 엄마 장난은 여기까지로 하자.
"아가, 하나씩, 천천히."
태양이 가장 높게 뜨고 낮이 가장 길다는 오늘도 햇볕은 뜨거웠고 여름 냄새가 났다.
달이 태양을 정말 가릴까, 하고 옥수수알을 똑똑 떼며 창밖을 봤지만 맨눈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못 보면 십 년 뒤에야 볼 수 있다지. 하지만 십 년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거 같아. 상주 할머니네의 마당을 생각하면 이리도 생생한데 이미 십 년 전인걸. 아마 십 년 뒤도 오늘처럼 별 다른 일 없는 하루 일 거야. 그땐 아윤이랑 같이 봐야 하니 셀로판지라도 구해야지.
아삭. 떼어주던 옥수수를 크게 한입 베어 문다.
하지만 십 년 뒤 아윤이는 한참이나 커있겠지.
알알이 잘 여물고 쑥쑥 땅을 딛고 자라던 할머니네 옥수수처럼.
아사삭. 옥수수에서 사과 소리가 난다.
*내일부터는 다시 예전 일기를 하나씩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브런치*우리가 한식> 스페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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