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아기와 나

한겨울, 아이스 음료를 산 술 취한 히어로

아빠는 히어로, 20200219

by 윤신



띠또 띠또 띠또.

누군가 우리 집 도어록을 열다 비밀번호가 틀렸다.

누구냐, 넌.



짙푸른 하늘이 깊어지는 밤, 반사적으로 아가를 끌어안고 문을 주시한다. 나 역시 이번 주에만 두 번이나 다른 집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실수를 했지만 경계 밖의 얼굴 모를 사람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촉각을 곤두세워 문밖의 누군가에게 귀를 기울인다.

'띠띠띠띠' 몇 번의 시도 후 드르륵, 마침내(?) 문이 열리고 쾌활한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왔다!!!!!!"



최종 보스 빌런을 무찌르는 히어로라도 되는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다. 하긴 그렇다. 세상 해맑게 씨익 웃는 우리 집 히어로다. 그는 이 추운 계절에 두 손에 아이스 음료를 하나씩 쥐고 집에 왔다. 집에 걸어오려면 10분은 족히 걸렸을 텐데 얼마나 손이 시렸을까. 저 음료 때문에 비밀번호를 틀렸을까. 아니야. 증류된 이슬 탓이지 뭐.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컵을 쥔 두 손이 빨갛다. 술기운이 손까진 덥히지 못했나 보다.

"너무 추웠겠다. 이걸 들고 걸어왔어?"

"그럼. 자기 주려고 사 왔어."



술 취한 마음에 커피가 마시고 싶어 주문하다 문득 집에 아가와 있을 내가 눈에 밟힌 모양이다.

근데 이건 무슨 음료일까. 그에게 물어보니 "요즘 항공업계가 얼마나 힘든 데에-." 하며 갑자기 코로나 19로 인한 경제난을 얘기한다. 아마도 술자리의 주제가 아니었을까 곰곰이 추측하는 사이 이젠 또 한참 요즘에 빠진 플스 게임 얘기를 한다. 리모컨을 돌리듯 시시각각 주제와 어투가 변한다. 홍양거리며 말하는 모습이 재밌어 가만 쳐다보는데 이젠 또 갑자기 나와 아가가 앉은자리 아래에 드러눕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는 아빠 따라 헬렐레 웃다가 꺄르르하다가 아빠 얼굴을 발로 쓰윽쓰윽 민다.



그들의 유쾌함이 나에게 전염된다.

이젠 내가 신나서 모녀의 하루를 재잘재잘하는 사이 그는 내 맨발을 베고 까무룩 잠이 든다. 돌려지던 리모컨의 전원이 꺼지고 만 것이다. 발 위의 양 볼과 두 손이 차다. 차가움은 다시 첫 질문을 떠오르게 한다. 그래, 얼음이 동동 띄워진 음료수가 있지. 이렇게 찬 날씨에 아이스 음료를 사 오다니. 여름에 그렇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더니 사람 취향이란 참 일관적이지.

별 이상한 데서 감탄이 나온다.



조심스레 아가 매트에 머리를 대고 큰대大자로 뻗은 아빠 옆에 아가를 뉜다.

큰 아가, 작은 아가. 아주 가관이다.

아가는 장난감이라도 되는 양 아빠의 머리칼을 고 자그마한 손으로 쥐어뜯는다.



"어머, 뭐 하는 거야?"

아가는 머리를 조물조물 만지고 나는 웃겨 넘어가지만 그는 일어날 생각이 없다. 작은 코를 골며 이미 꿈나라로 떠난 것이다. 아가는 아빠를, 나는 그 둘을 보며 즐거운 상상을 한다.

가만히 있어도 때론 사는 게 참 재밌다.



아가의 옷을 벗기고 거실 한가운데서 목욕을 시키는 데도(겨울엔 화장실 쪽 공기가 차서 거실에서 씻깁니다) 대자로 뻗은 그는 당최 일어날 생각이 없다. 목욕이 끝난 뒤 침실에 들어가 아기를 재우고도 그는 2시간을 더 잤다. 보다 못한 난 따뜻해진 양 볼을 부드럽게 찰싹찰싹 때린다.

일어나. 렌즈는 빼고 자야지. 안 그럼 눈 아파.

큰 아가가 버둥댄다. 다시 찰싹 찰싹 찰싹.



헤롱대는 그의 눈에서 렌즈를 빼고 좀비 걸음의 그를 침대에 보내는 사이 어느새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졌고 우리 집은 여전히 평화롭다. 잘 준비를 하며 거실에 널브러진 것들을 있는 힘껏 대충 정리하다 그 정체 모를 음료수는 냉장고에 넣었다.

얼음은 조금 녹겠지만 뭐 어때, 나에겐 또 내일이 있으니까 내일 천천히 마시지 뭐- 하고.

그리고,

다음 날 마신 그 허여멀건한 음료는 내가 좋아하는 달달한 바밤바의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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