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아기와 나

시절 친구

20200222

by 윤신




5년 만에 대학 친구를 만났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은 친구 앞에 어느 '시절'이나 '지역'을 붙여 카테고리화하는 경향이 있다.

중학교 친구, 고등학교 친구, 동네 친구, 수영장 친구.

오늘 만난 친구는 그중 시절 친구인 셈이다.



오래된 만남은 낡은 서랍 속의 수첩을 꺼내는 듯 부끄럽다.

사춘기의 하루를 빼곡히 적은 일기장을 들추는 양 볼은 빨개지고 눈은 샐쭉, 입은 괜히 삐죽거린다.

'넌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어느 스릴러물에서나 나올법한 대사가 그에게 향한다. 우린 서로 많은 것을 안다. 아니, 알았다.

그와 난 대학교 시절 서로의 취향, 성적, 가족관계는 물론이고 연애사까지 빠삭했다. 한 학년에 40명도 채 안되던 과 특성상 매일을 부대끼며 지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둘 다 경상도에서 상경한 탓에 사투리가 주는 친밀함이 있었다. 매일같이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갔다(당시엔 모두 절대적일 만큼 심각했습니다만).

비슷한 몽상가 기질을 타고나 현실보단 이상에 발을 두고 있던 우리는 항상 오늘보단 언젠가를, 현실보단 꿈을 이야기하고 그 속에서 살았다. 짜라투스투라를 이야기하며 하룻밤을 지새우던 젊음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이제 시절이라 불린다.

스무 살, 순수한 치기로 생을 살며 넘어지기도 자주 넘어지고 현실의 벽에 뒷걸음질 치기도 한 그와 나의 오늘은 여전한 듯 다르고 다른 듯 여전했다.

아니. 거짓이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십여 년을 다른 길을 걷고 다른 삶을 살던 우린 딱 그만큼 달라졌다.

지나온 경험만큼, 굴린 생각 바퀴만큼, 내쉬었던 호흡만큼.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선 꿈을 꾸는 무모한 젊음의 냄새가 났다. 여전히 몽상가의 싱싱한 치기가 느껴진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난 일상의 순간을 보내며 하루치(아기가 깨어나고 잠들기까지)의 삶을 산다. 어제를 떠올리거나 먼 내일을 그리지 않는다. 사실 부정보다는 불가능에 가깝다. 내겐 당장의 오늘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가득 차는 이유다.



친구는 책 속의 이들에게 동경과 자기 투영을 했다. 그들의 말과 삶을 추구했다. 그가 읽었을 수많은 철학 책의 양이 그대로 언어에 녹아있어 마치 '수학의 정석'의 철학판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의 그 시절 짜라투스투라가 떠오르며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왜인지 이야기를 들으며 점점 그 아이가 신성화하고 거대하게 느끼는 인물들도 결국 '인간'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는 데다 위대한 인물마저 아기였던 시절이, 누군가에게 오롯한 보살핌을 받고 사랑을 받던 시절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그의 성장은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온전한 시간과 정성의 결정체였을 테지. 그 완벽한 이론의 인물도 한때는 똥 싸고 울기만 하는 아기였을 거란 거야. 세상 모든 철학서와 위대한 저서도 모두 한때의 아기가 성장해 오랜 시간 수많은 생각과 실천을 거쳐 맺은 감정과 이야기를 말로 글로 옮긴 것일 테니까. 아니, 애초에 서재 속 철학가의 사상보다 시장 좌판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의 인생철학이 더 강한 것 아닐까.

같은 이야기 아래 두 개의 다른 생각이 각자의 꼬리를 먹고 빙빙 돈다. 그의 어제를 닮은 오늘과 나의 오늘을 위한 오늘은 언젠가는 만나게 될까, 궁금하다.



그렇게 우린 한자리에서 거의 서너 시간을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걸으면서도 자리를 옮겨서도 대화는 계속되었다. 처음 대학교 구예술관 계단에서 마주쳤던 기억부터 오늘의 하루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날들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지나갔다. 풀기 어려운 삶의 수수께끼와 어제와 다른 우리들의 모습도 함께 테이블에 오른다.

우린 도전하기에 겁이 많아진 걸까. 그런데도 삶은 왜 여전한 걸까.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나 자신과 어떤 대화를 할까. 뭘 하며 살아야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몇 시간이 지나도 답 하나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답은 있는 걸까.



글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확실하고 여전한 건 우리의 웃음 아닐까 한다.

느닷없는 포인트에서 터져버리는 웃음. 성숙한 어른의 것이 아닌 낄낄거리는 아이들의 것과 같은 웃음.

서로의 눈앞에서 실재하는 웃음의 표정과 소리.

그래. 그거면 됐지 뭐.



우리가 지나온 스무 살을 다시 감각해본다.

그 자유의 고민과 방황을 내 딸, 아윤이도 지날 것이다.

건강한 스물을 살아가도록,

넘어져도 툴툴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그 시기를 시절로 돌아봤을 때 환한 웃음을 지을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보고 지켜줘야지 하는 마음이 든다.

모녀관계라는 게 친구보다도 평탄할 수 없을 테지만 시절 친구나 지역 친구는 있어도 시절 엄마는 없는 법이니까.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투닥거리면서 응원하면서 살아갈 관계니까.

물론 아직 이가 두 개만 쏘옥 내민 아윤이의 (열 살은커녕)스무 살은 아직 한참 먼 이야기지만 말이다.



참.

오늘 우리 만남의 시작, 반가움에 자리에서 발딱 일어난 나를 보고 친구는 물어온다.


"여어-. 잘 지냈어? 맞다. 네 아기 이름이 뭐지?"

"야아. 오랜만이다. 아윤이, 김아윤이지."

"맞다. 맞다. 아윤이 엄마. 그러니까, 아윤이. 아들이지?"

"....?"


몇 번 보낸 아기 사진을 보고 아들이라 오해했던 모양이다.

친구야. 내 '딸'이야. 사진들이 다 듬직하게 나왔지만 아윤이는 딸이야. 심지어 이름도 아윤이잖아.

어쩌면 동상이몽의 지난至難한 대화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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