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아기와 나

도라에몽 주머니 입

20200409

by 윤신





일상의 물건이 위협적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아기를 키우는 집이라면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책이 얼마나 무서운지, 무심코 낮은 테이블에 올려둔 손톱깎이가 얼마나 아찔한지 알 일이다.



아기는 저만이 가진 물건의 활용법으로 집안 모든 사물을 대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이 아닌 입으로 사물을 보고 탐색한다. 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 별별 천지 것들을 꼬막만 한 손으로 쥐고 잡아당기고 밀고 쓰러트린 뒤 잔해를 입에 넣는다. 분유나 이유식을 먹을 때 위아래로 쪽 벌리는 아기새를 닮은 입은 너무나 귀엽다. 하지만 그 입이 이것저것 모두 빨아들일 기세의 우주의 블랙홀이 될 때는 겁나기까지 하다. 흥미를 끄는 모든 것을 입에 넣겠다는 호기심과 열정이란...!


어쩌면 그 호기심과 열정으로 인류는 여기까지 발전한 게 아닐까 하는 잡동사니 같은 생각을 하다 아가를 바라본다. 흐뭇하다거나 자상한 미소의 여유로운 눈빛이 아니다. 오히려 날렵한 독수리의 그것이다.

이맘때의 아가 엄마들이 그러듯 내 시선은 아기의 입을 향한다. 어디 또 오물거리고 수상한 뭔가를 먹는 건 아닐까 살펴본다.



난 유별난 엄마가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아윤이는 나의 첫아기지만 전부 새것을 사주겠다고 생각지도 않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커도 된다는 주의다. 혼자서 이것저것 시도하고 그러다 넘어지면 일어나면 그만이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아기의 안전은 다른 문제다. 제 입이 도라에몽의 주머니라도 되는 양 온갖 것을 다 집어넣으려고 할 때면 꼼꼼히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위험한 것, 날카로운 것, 입에 쏙 들어갈 만한 작은 것들은 멀리멀리 치워버린다.


핸드폰, 로션 통, 책, 장난감, 지갑, 신던 양말, 내가 입고 있는 옷, 악, 우쿨렐레, 비닐봉지, 자수실, 물티슈 팩.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 목록이다. 아윤이가 두 손으로 꼭 쥐고 입에 챱챱챱거리던.

처음 아기의 도라에몽 주머니 습성을 눈치챈 건 우쿨렐레 악보를 염소처럼 뜯어먹던 때다. 사실 이때까진 장난감과 내 팔다리(?)만 무는 정도여서 '모든 아기에게는 염소인가 인간인가의 시기가 있다'는 말에도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악보를 입으로 뜯어먹을 때도 종이쯤 먹어도 별 탈은 없겠지만 잉크는 왠지 걱정되어 입에 문 종이를 빼낸 정도다. 하지만 오늘 아기의 입에서 발견한 것은, 내 상상을 벗어났다.

아가도 놀란 나를 보고 놀랐다.


청소 바람이 불었다. 보통은 아기와 뒹굴거리며 주로 시간을 보냈는데 오늘은 이것저것 정리하고 청소하는데 긴 시간을 썼다. 계속 신경 쓰이지만 놔두던 볼펜 자국도 지우고 냉장고에 화석처럼 굳어가던 음식도 정리하고 쓰레기를 모아 현관 가는 길목에 두고 한참 설거지를 했다. 그동안 아윤이는 보행기에서 놀고 있었는데 마지막 기억은 아기가 늘 그러듯 뒤로 묶은 앞치마 끈으로 장난치며 놀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아지경의 설거지를 끝내고 보니 바로 뒤에 있던 아기가 보이지 않았다.


"아윤아아아아"


분명 작은방을 탐험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 방 쪽으로 가려는데 아니, 뭐지? 아윤이가 방문 앞에서 뭔갈 손에 꼭 쥐고 맛나게 쫍쫍쫍 빨아먹고 있다.

쟤가 뭘 들고 먹고 있지? 내가 간식을 줬던가?

눈에 모든 힘을 집중해서 네모난 형태와 길이, 색으로 정체를 판독한다. 미간에 힘이 들어간다.


1초, 어쩌면 2초.

알아채는 데 정적의 1-2초가 걸렸다. 아니, 저건! 동공이 커지고 낚아채는 손동작은 빨라진다.

세상에나. 고양이들이 다 먹고 난 츄르 스틱(고양이 간식)을 쓰레기 봉지에 꼽아 두었었는데 그걸 쏙 빼서 빨아먹고 있었던 거다. 얼마나 맛있게 먹고 있던지 하마터면 내가 아기 간식을 줬다고 오해할 뻔했다. 츄르인지 알아채고 황급히 뺏는데 아가는 칭얼거리며 입을 삐죽인다. 잘 먹고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는 얼굴이다. 그사이에 난 재빨리 츄르의 성분을 본다. '닭고기'다. 조금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유식에 닭고기가 들어간 지 어언 10일. 저도 닭고기를 먹을 줄 안다 이거지.

하아. 다시는 츄르 스틱이고 쓰레기고 뭐고 바로바로 정리해야지.



그래도 일단 하던 청소는 끝내야 했다.

씻어둔 반찬통들을 털어 말리려 하는데 이번에도 아가가 뭔갈 맛있게 오물오물거린다. 이젠 상황 판단할 겨를이 없다. 곧바로 아기의 입안에 손가락을 쑥 집어넣었다. 난 아무것도 준 게 없다. 또 뭔지도 모를 무언가를 입안에 이리저리 돌려가며 맛있게 먹다니.

요 쪼꼬맹이 또 뭘 먹고 있어!



말캉하고 부드러운 입안을 조심스레 휘휘 저어도 아무것도 없다. 아닌가? 생각하는 찰나 바스락거리는 게 느껴진다. 이거다! 꺼내보니 전자제품에나 붙어있었을 법한 비닐 스티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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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는 또 사탕이라도 뺏긴 양 입을 삐죽인다.

'아이고, 요놈아. 아이고, 요놈아. 그냥 까까 달라고 말을 하지, 아이고. 요놈아.'

타령 같은 소리를 내며 아기에게 하얗고 긴 과자를 손에 쥐여줬다.



아가는 성장했다.

사물을 쥐고 당기고 입에 넣고 씹을 줄 안다.

223일 동안의 성장이다.

배아의 세포분열 시기를 빼면 뱃속 시절보다 세상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다. 아기에게 세상은 더 이상 작고 붉은 둥글한 형태가 아니다. 형형색색으로 가득 찬 끝이 없는 세계다.

나의 뱃속에 있던 작은 딸은 더욱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탐험할 것이다.(일단은 입에 모두 다 넣고 보겠지만)



나도 엄마로 태어난 지 223일이다.

살아온 기간에 비해 턱없이 짧지만 그 어떤 시간보다 강렬하고 소중한 시간이다.

자꾸자꾸 성장하는 작은 사람을 위해 나 역시 성장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더 많은 세상을 보고 느낄 아이의 든든한 뿌리가 되어줘야지.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 있어야지.

또 늘 주의를 기울이고 챙겨야겠다 새긴다. 지금은 내게는 다만 생활의 물건이 아윤이에게는 정글의 물건이 될 수 있으니까.



문득 요 쪼꼬맹이 녀석이 빈 츄즈 스틱을 양 손으로 꼭 잡던 얼굴이 생각난다.

내일은 닭고기 이유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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