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아기와 나

첫 도서관 데이트

20200627, 어떤 책을 처음으로 빌릴까

by 윤신


쉿! 여기선 조용해야 해.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곤 속삭인다. 아가는 넓거나 좁고 어둡거나 환한 책등사이를 지나며 수정 같은 눈을 밝히다 자그만 손을 뻗으며 버둥거리는 중이다.

여기는 '동네 작은 도서관', 우리는 첫 도서관 데이트를 한다.


아가에게 책은 아직 읽고 상상할 인쇄물이라기 보다 잡고 찢어 입으로 맛볼 '무언가'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싶다. 9개월 아기에게 어차피 책과 장난감은 동급이다. 아윤이 손에 쥐여 바들거리는 책이 한두 권일까. 책장을 한 장씩 넘기는가 싶다가도 휙 집어던지고 표지를 물어뜯는다. 책 기둥과 가름끈이 제본에서 뜯어져 나가 너덜거리기 일쑤다. 여기저기 뒹굴며 신음하는 책의 마음을 알지만 어쩌겠는가.
언젠가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을, 커다란 세계를, 일생 동안 좋은 친구가 될 누군가를 소개해 주고 싶은 엄마의 욕심을.
토닥토닥, 미안해. 책들아. 아윤이가 좀 더 크면 너희들을 다정히 대하라고 잘 가르쳐줄게.

하지만 도서관의 것은 공용이니 책이니 다른 문제다. 얼른 아기의 손을 쏙, 내 품에 둔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말한다.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혹자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고 혹자는 좋은 일과 유머에 쓰고. 나는 내가 먹는 걸 일과 좋은 유머에 씁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조르바가 '뭘 하는지'뿐 아니라 '뭘 먹는지'까지 포함시킨 점이다. 대충 인스턴트로 하루 두 끼를 넘기는지 소담하게 집밥을 지어먹는지 혹은 미슐랭 가이드에 적힌 레스토랑을 살피는지,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단백질 셰이크로 보충하는지. 음식의 내용과 습관으로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 환경, 생활, 삶에 대한 태도까지 추측하고 알 수 있다는 의미다. 당연한 데다 합당한 추론이다.


또 어느 한 미니멀리스트는 내가 지니고 있는 것, 내 주위를 채우는 것이 곧 나라며 어질러진 방안이 곧 나를 대변한다고 했다. 도무지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 내 책상과 책장을 보며 난 얼마나 뒤얽힌 사람인가에 괴로워하다 그 문장 구조를 훔쳐 나도 한 줄 남겨본다.
내가 오늘 집어 든 책이 오늘의 나를 말한다.


그렇다. 어떤 이유에서건 내가 저 빼곡한 책의 숲에서 단 몇 권을 골라 펼쳐보는 데는 큰 의의가 있다.
오늘의 기분, 요즘 가장 마음 두는 분야, 어쩌면 요즘 부족하다고 느끼는 분야, 관심이 있는 분야, 좋아하는 작가 혹은 장르, 혹은 잠시 잠깐의 흥미.
'오늘'이 아니고서야 절대 흥미를 느끼지 못할, 펼쳐들지 않을 책들도 '오늘'이기에 빼들 수 있다.
그러니 나는 말한다.
오늘의 책은 당신의 오늘(요즘)을 말한다고.


내가 고른 '오늘의 책'은 엄마가 함께 놀아주는 유아 어쩌고 책이었다. 꽤 오랜 시간 한 자리에서 탐독했다. 책을 들지 않은 오른손으로는 유모차를 앞, 뒤로 흔드는 동작을 하면서다. 여자는 뇌 구조상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던가. 유모차를 움직이는 팔이 기계처럼 정확한 박자를 갖고 움직이는 사이 책을 쥔 손은 시기적절하게 책장을 넘기고 머리는 내용을 입력한다. 조용한 일사불란함 속 아윤이는 흔들리는 빨간 유모차 안에서 곤한 단잠에 빠져 있다.



책에는 대충 3개월부터 24개월까지의 아기 발달 사항과 놀이법이 쓰여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만한 독자층은 한정되어 있다. 아이를 가진 엄마, 또 그중에서도 유아를 가진 엄마. 당연히 나도 포함이다.
이제 막 9개월이 된 아윤이와 어떻게 하면 새로운 시간을 보낼까 하고 궁리하던 차에 이 책은 한여름 시원한 보리차처럼 반갑다. 하지만 동시에 이전의 나라면 절대 들여다보지 않았을 책이다. 아예 육아 쪽은 힐끔 바라보지도 않았을 테지.


전체 목록의 두 번째 챕터인 6-10개월 아기와의 놀이법. 아윤이의 개월 수에 해당되는 챕터를 중점적으로 살피고 메모한다. 이런 유의 책은 소설을 읽는 방식과 다르다. 수험생들이 핵심 부분 공략하듯 내게 필요한 알맹이만 쏙쏙 찾는다. 딱 지금 할 수 있는 놀이와 한 달 사이에 시도할 수 있는 놀이 방법을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발등 걸음마(11개월~), 소꿉장난(11개월~), 공을 굴리기(10개월~), 뜯고 찢고(10개월~), 곤도잼짝(짝짜꿍 같은 것, 10개월~)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엔 이미 알게 모르게 집에서 자주 하던 놀이도 있었지만 책이 아니었다면 미처 알지 못했을 놀이 법도 있다.
예를 들면, 색종이를 사 와 아이와 찢기 놀이를 하는 것, 바닥에 비닐을 깔고 각종 채소와 간식을 두고 으깨고 탐색하며 노는 것이다. 매번 책을 찢는 아윤이를 "안돼-."라며 말리기만 했지 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채워주려 놀이로 만들 생각을 못했다. 또 간식과 채소를 계속 입에 넣다 빼고 주위를 어지럽히는 걸 보며 나무라기만 했지 비닐을 깔고 실컷 놀게 해 줄 생각 따위 해본 적도 없다. 위험하고 어지르는 것을 못 하게 막는 것만이 교육은 아니다. 아기에게 모든 것은 놀이임을, 엄마는 그 놀이를 즐겁고 안전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줘야 함을 새삼 마음에 담는다. 물론 종이를 찢고 입으로 가는 아윤이의 손을 블로킹하고 바닥에 깐 비닐을 입으로 뜯어먹는 건 아닌지 감시하는 건 책에선 배울 수 없는 엄마의 영역이지만.


나는 오늘, 작년의 오늘이라면 절대 펼쳐들지 않았을 책을 집어 들고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읽었다.
아마 조만간 도서관에 다시 들러 오늘의 나를 말하는 그 어떤 책을 손에 들겠지. 누구도 모를 일이지만 단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때도 이 작은 나의 아가를 쫄래쫄래 데리고 갈 것이라는 것.
그리고 아주 가까운 내일 아윤이의 이름으로 도서 카드를 만들 거라는 것.


새삼 궁금하다.
아가는 처음으로 어떤 책을 빌릴까.



*한 달 전에 쓴 글과 사진입니다.
고작 한 달인데도 아윤이는 이때보다도 훌쩍 자랐습니다. 세상에나.
그리고 한 달 사이 저는 육아에 관한 책을 한두 권 더 읽었고요. 지금도 바로 곁에 "나의 육아에는 '내'가 좀 더 필요했다!"라는 글귀가 크게 쓰여있는 책이 있습니다. 역시 책은 오늘의 나를 말해주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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