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아기와 나

부디 따뜻한 겨울, 모두에게

한여름에 다시 쓰는 작년 겨울이야기

by 윤신


일주일 정도 한 문장도 쓰지 못했습니다.

쓸 것이 없었다기보다는 쓸 수가 없었던 거지요. 15개월의 생을 살고 있는 아기의 엄마들이 그렇듯 아기가 잠에 들고 난 까만 밤이면 늘 앉던 의자에 앉아 우유를 덥힐 힘 하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근 일주일, 아니면 한 달 가까이, 어쩌면 몇 달을요.



물론 이 말은 거짓입니다.

한 달 중 며칠은 그와 식탁 앞에 마주 앉아 찬 맥주를 들이켜기도 하고 아마 일주일은 의자의 단단함에 기대 책을 읽기도 했으며 또 일주일은 썼던 일기를 옮겨 적고 사나흘은 내일을 위한 스트레칭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우우웅,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고 차분한 밤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루를 기록할 수 없었을까 생각합니다. 손가락 끝에만 힘이 들어가지 않아 타자를 칠 수 없었던 건 아닐까, 남은 잔머리를 그러모아 변명을 만듭니다.



오늘은 아윤이와 오랜만에 둘만의 데이트를 했습니다.

잔잔한 밤바람 같은 데이트였지요.

보통 연인의 데이트를 떠올리면 두근대는 설렘이 함께지만 어린아이와의 것은 왜인지 조금의 피로와 불안을 떠오르게 합니다. 아직은 아기와의 외출이 익숙지 않아 이유 없이 초초한데 거기에 더해 응가를 싼다거나(초조함과 마음 급함은 몇 배가 됩니다), 울고 짜증을 낸다거나(강아지를 못 만지게 했다고 길가에서 드러누워 우는 아기를 달랠 때 나오는 한숨은 참 무겁습니다), 10분 거리를 가는데 두 시간이 걸린다거나(아이에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기의 흥미가 가는 길입니다), 주차장이나 큰길에서 차 쪽으로 달려 나간다거나(운전하던 도중 나에게 돌진하던 아기 왈라비가 잊히지 않습니다), 뭐 그런 것들이요.

그리고 사실 일단 데이트하면 외식인데 아기와의 외식은 떠올리기만 해도 얼어붙기조차 합니다. 이뤄내야 할 미션 같은 느낌이에요. 수행해야 할 퀘스트 같은 것이요.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미 얘기한 듯이 잔잔한 밤바람, 그러니까 밤에 불어 살짝 차긴 하지만 잔잔하기에 무사히 넘길 수 있는 데이트였습니다.



먼저 우리가 향한 곳은 고양이 책방 사장님의 '공간'이었어요.(코로나로 인해 사장님은 책방을 정리하고 그 모든 책을 한 장소에 모아두곤 그곳으로 출퇴근합니다. 책을 팔지 않으니 더 이상 서점은 아니고 서재라 불리기엔 책 보다 사람이 중요한 곳 같아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생각 중이에요. 아니, 무엇보다 사장님은 이제 어찌 호명해야 할까요.) 해안 남로를 따라 섬의 서쪽 거의 끝까지 가면 있는 그곳에서 우린 그녀가 해준 제철 굴죽을 먹고 한껏 뒹굴었습니다. 역시나 제철인 사과를 먹고 보이차도 마시고 아윤이는 한잠을 자기까지 했지요. 그 사이 저는 한 권의 만화책과 부분의 소설을 읽으며 간만에 안온한 시간을 누렸어요. 모두 그 든든한 굴죽 때문인가 싶습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아가의 낮잠이 끝나고 책도 덮였습니다. 막 흥미진진하기 시작한 책은 빌리기로 했어요. 다시 기운에 찬 아윤이를 데리고 쓰레기 산에 데려갑니다. 조금 더 서쪽으로 차를 몰고 가서 정말 말 그대로 쓰레기 더미가 산을 이룬 곳으로요.

이유가 있습니다. 이곳에 아윤이보다도 훨씬 작은 네 마리의 강아지가 있거든요. 집도 없고 어미도 없이 쓰레기 산 중턱에 서로의 체온으로 겨울을 버티고 있는 강아지들입니다. 지난주에 그 강아지들을 처음 알게 되고는 찬 바람이 뺨에 닿을 때마다 생각했어요.

뭐라도 줘야지. 밥이라도, 물이라도, 이불이라도.

개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릅니다만 일단 쓰지 않는 고양이 방석과 이불을 챙기고 더 이상 두르지 않는 목도리를 가져갔습니다. 부스스한 털로 덮인 작은 몸들이 추위에 강해 보이지 않았거든요. 사료와 물도 잊지 않았습니다. 강아지들이 있을까, 부디 있기를.

아니 누군가가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 부디 이젠 없기를.



걸어가는 동안 저 멀리 쓰레기 더미 사이로 하얀 생명체들이 사정없이 꼬리를 흔들며 달려옵니다. 그들의 무사는 다행이지만 안타까움을 동반합니다. 강아지들은 반가워하다 소리를 지르며 되려 더 저들을 반기는 나의 강생이(아윤이를 말합니다)를 발견하곤 도망갑니다. 이렇게 작고 시끄러운 생명체는 뭐야, 하고요.

해는 바다를 넘어갈 준비를 하고 하늘과 아윤이의 조그만 뺨과 코는 붉어집니다. 서둘러야겠어요.

두 마리가 바들거리며 앉아 있는 쓰레기 산 가운데 고양이 방석과 이불, 목도리를 둡니다. 역시나 사료와 물도 잊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길, 몇 번이고 돌아다본 강아지들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정물처럼 있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글로 하루를 쏟아낸 것은.

전부를 쏟아낸 것도 아닌데도 조금 후련합니다. 내 몸에 쌓여있던 하루의 무게가 손가락 끝으로 흰 공백에 옮겨지는 것 같아요. 매일 조금이고 적어나갔던 이유는 이게 아닐까, 기억이 감각합니다. 혹은 몇 달 전보다 더 여유로워 보인다는 말을 사장님께 들어서인지도 몰라요. 요즘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안심이 되는 말이거든요. 몇 달 전보다 더 편한 엄마가 되었을까. 여전히 서투르지만 조금 용기가 생깁니다.

글을 쓸 여유가 없어도 좋아요. 아기와의 관계와 시간에 더 여유가 생긴다면요. 그걸로 좋습니다.



언젠간 아윤이와 봄바람을 닮은 데이트를 하겠지요. 그날까지 몇 번이나 더 쓰레기 산을 찾아갈지는 모르겠습니다. 부디 그들이 자기만의 집을 갖고 새 가족을 갖길 바라요. 간절히 간절히 바라요. 벌써 바람이 차가운 겨울의 시작, 그 어떤 생명도 시린 밤을 보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이만 아침에 일어난 그 모양 그대로인 이불로 들어가겠습니다. 저만의 동굴로요.

이 밤, 모든 생명에게 따뜻하고 편안한 순간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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