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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Oct 28. 2022

여름의 유성

초록의 냄새가 진동하던 어느 날의, 


오랜만에 머리를 짧게 잘랐다. 바람에서 여름 냄새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부의 사람들은 계절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데 나도 그 안에 속하는 걸까. 물에 젖은 초록의 냄새가 진동을 할 때마다 단발병은 환절기 비염처럼 되살아나 머리끝이 살살 간지러워진다. 무작정 걸음이 멈추는 대로 미용실에 찾아갔다. 허리 가까이 길게 자란 머리를 잘라 달랬더니 미용사가 이마를 들썩이며 열 번은 더 물어본다. 


정말요? 후회 안 하시겠어요? 정말이죠?


똑 단발을 확신하던 마음이 살짝 흔들린다. 정말? 후회 안 하겠어? 여자는 머리발이라는데 괜찮겠어?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나의 갈등에 그가 던진 말을 생각해낸다. 

‘어차피 머리는 길잖아? 자르고 싶으면 자르면 되지 뭐.’ 

사각, 하는 과일 자르는 소리가 났다. 몇 년 동안 기른 머리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어쩐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될 대로 되란 마음이 새어나왔다. 

저기요, 귀밑 1센티로 잘라주세요.

미용사의 이마가 다시금 살짝 꿈틀거리고 나서야 검은 생머리가 층도 없이 가지런히 귀밑에 놓였다. 집에 돌아와 미용사가 내게 물었던 횟수만큼 그에게 물었다. 단호하던 마음은 호기가 아니라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어울려? 어때 보여? 그가 대답했다. 응, 괜찮아. 반응이 시원찮아 다시 물었다. 정말? 이상하지 않아? 그가 다시 대답했다.

응, 그리고 어차피 머리는 기르잖아.      



아마 그는 모를 것이 분명했다. 일반적인 머리카락의 생장속도로 한 시간 전 정도의 머리로 되돌리려면 삼 년이 걸린다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그는 옳았다. 시간은 흐른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그것만이 확실한 진실이다. 아이는 자라고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머리 역시 자랄 것이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때로는 평지를 걷다 보니 오늘이다. 참 오래되고 꾸준한 걸음이었다. 삼 년 뒤도 그다지 다를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사실 이 예감은 익숙한 것으로 오 년 전 유성우가 내린다던 날의 것을 닮아있었다.     



그날은 이례적으로 비가 오듯이 별이 떨어진다는 날이었다. 뉴스나 SNS에서도 다들 그 얘기로 떠들썩했다. 얼마큼 떨어질까? 눈이 부실 정도일까? 보러 갈까? 깜깜한 밤, 연애 중이던 그와 내가 살던 집에서 가까운 산으로 향했다. 가파른 콘크리트 비탈길이 끝나자 흙길이 이어졌다. 나무가 바람에 울었고 새는 가끔씩 울었다. 숨을 몰아 내쉬며 오른 정상 언저리에서 우린 목이 아프도록 하늘을 바라봤다. 검푸른 바다를 닮은 하늘에 간혹 인공위성으로 보이는 빛만이 반짝였다. 많은 사람들 역시 아기 새처럼 목을 빼고 그것을 쳐다봤다. 조명 빛을 받아 흰 얼굴들 아래 모두의 몸은 어두움에 가득 묻혀있었다. 저 빛일까? 아니야, 그럴 리 없지. 저건 깜박이잖아. 깜박이며 빛나는 건 인공위성이야. 그리고 우린 그냥 별이 아니라 떨어지는 별을 기다리는 거라고.



날씨가 흐렸던지 예보 시간이 지나도록 별 하나 힐끗 떨어지지 않았다. 팔월의 까만 산은 추웠다. 어깨를 움츠리며 터덜터덜 돌아가는 사람이 늘었고 우리도 이내 산 아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낭만이 일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중턱까지 내려가 잠시 쉴 겸 절 앞에 있는 너른 평상에 앉았다가, 절에 사는 강아지랑 술래잡기를 하곤 둘 다 그만 발라당 누워버렸다. 깔깔거리며 아직 끝도 나지 않은 그날을 영웅담처럼 늘어놓았다. 별이 가득 떨어지는 하늘 아래, 어두운 산을 탐험하며 강아지로부터 유물을 구한 모험담으로 현실과 몽상의 어느 가운데였다. 그러고 보면 그땐 늘 그랬다. 그는 내가 깨어서 꾸는 꿈이었다. 매일이고 찾아가고 싶은 한낮의 꿈... 그때였다. 모험담이 점점 절정으로 치달아가던 사이 거짓말처럼 별 하나가 똑 선을 긋고 떨어졌다. 선명한 한줄기 빛이 설탕처럼 하얬다. 


우와! 봤어? 


동그래진 눈을 가까이 맞추고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달을 보듯 별을 봤다. 작은 별 하나에 호들갑을 떨고 하이얀 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를 맴돌던 여름밤이었다. 별이 떨어진 그 시간 그 절 앞의 평상에 앉아 그는 내게 청혼했다. 별사탕 같은 반지를 든 그의 곁에 강아지도 함께 쪼그려 앉았는데 두 생명체의 눈은 모두 나를 향하고 있었고 어쩐지 진지했다. 순간 나는 말했다.

그럼 이제 둘 중에 선택하면 되는 거야? 

우린 웃었고 그때 예감이 들었다. 아마 이런 날들을 보내겠지. 늘어진 몸을 탓하며 헉헉대다가 뭔가를 기다리기도 하다가 예고 없는 기적에 호들갑스러워하다가 다시 깔깔 웃는, 그런 날들을 살 거야. 예언 같은 직감이었다.     



알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질 때면 그를 바라본다. 매일 만나도 매일 설레던 시간들과 길고 흰 빛을 그으며 떨어지던 별을 기억한다. 여전히 건강하고 선한 영혼이 얼굴에 그대로 내비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안도한다. 그리고 아이, 내 인생에 없을 줄 알았던 나의 아이. 고개를 돌려 우리의 꽃이자 뿌리인 딸을 바라본다. 서른셋 자궁경부암을 진단받고 네 번의 수술을 거친 자궁에서 기적처럼 작은 심장을 뛰어대던 아이다. 길게 떨어지던 작은 별이 너였을까. 두 사람은 불쑥 한낮의 유성처럼 내 인생에 찾아들었다. 사랑들을 지나, 사랑이 사랑이었나에 대한 의혹도 지나 이제 나는 그들을 거듭 사랑한다.



가볍게 자른 머리처럼 몸도 가볍길 바라며 살을 빼기로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역시 다이어트 돌입 모드다. 이것도 여름 맞이 루틴인가 싶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싶다. 겨울에 축적한 게으름을 몰아내고 운동과 식이조절을 한다.

이렇게 또 여름이 오고 있다. 초록의 냄새가 진동하는 우리의 여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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