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어린이가 되는 순간
언젠가부터 달이 아닌 해로 아이의 나이를 센다. 아마 36개월이 지나고 서다. 그전엔 달로써만 아이의 자람을 측정할 수 있다는 듯 '몇 살이에요?'라는 질문에도 '34개월이에요'따위의 대답을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아이는 순간으로 자라기 때문이다. 몇 살이라는 큰 테두리에 아이를 구분 짓기에 아이는 초단위로 자란다. 어제의 아이는 오늘의 아이와 다르다. 아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그 차이는 명백히 커서 결국엔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른다.
달로도 부족해. 일수로 아이의 성장을 말하는 게 낫겠어.
아윤이는 8월 31일생. 오늘로 1231일의 생을 살았다. 온몸에 붉은 피를 얇은 막처럼 쓰고 눈을 꼭 감고 태어난 나의 딸이다.
1231일 동안 아이의 연두부 같던 피부는 찌개용만큼 단단해졌고 간신히 고개만을 간신히 지탱하던 약한 근육은 이제 힘껏 뛰어오를 수 있을 만큼 튼튼해졌다. 그뿐일까. 방싯 웃거나 우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하던 아이는 이제 맘껏 제 할 말을 쏟아낸다. 그렇다. 말 그대로 소나기처럼 쏟아낸다.
엄마, 엄마. 그래서 토끼가 그랬대. 코끼리는 너무 커서 우리 집에 못 들어오니까 대신 밖에서 잠자라고 하자. 그리고 토비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 그러면 토비 속상해서 울지도 몰라. 그런데 우리 그때 할머니집에서 인어 봤지? 엄마, 엄마. 아니야 그렇게 하면 안 돼. 이것 봐봐.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
날 가르치고 타이르고 종용하고 요구하다 이내 또 무언가를 말한다. 그래서 있지, 그래서 말이야.
고요를 향한 갈망이 이보다 더 간절한 적이 있던가. 순교자처럼 아이의 말을 듣는다. 응, 그렇구나. 가끔 혼이 반쯤 나간 대답을 하면 1231일을 산 아이는 금세 그것을 간파한다.
엄마, 근데 내 말 듣고 있어?
또 가끔 아이는 나를 위로한다. 어느 날이었다. 멀리 나간 자리에서 만나기로 한 제 아빠와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아 난 연신 조급해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닐까. 아니겠지? 왜 연락이 안 되지. 그러니 아이는 말한다. 엄마, 괜찮아. 아빠는 괜찮을 거야. 기다리면 올 거야. 아이의 눈빛은 단단했고 꼬막손은 어느새 내 손 위에 얹어졌다.
괜찮아, 엄마.
하지만 역시 아이는 아이다. 한동안 방학이 끝나고 찾아온 어린이집 등원일, 아윤이는 태어나던 그날처럼 울었다. 작은 주먹에 온 힘을 꼭 쥐고 입을 둥글게 벌리고 투명한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렀다. 어린이집 싫어. 친구도 싫어. 엄마 보고 싶어. 엄마 보고 싶어. 바로 앞에 마주한 나를 두고 계속 울었다. 엄마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나는 말했다. 나도 아윤이 너무 보고 싶어. 하지만 엄마도 할 일이 있어서 그것만 하고 얼른 아윤이한테 갈게. 꼭 빨리 갈게. 아윤이한테 달려올게. 아이의 마음이 그 말에 조금 풀린다. 정말 빨리 올 거야? 응, 그럼.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까지 찍는다. 꼭 그럴게. 며칠 그런 실랑이가 오간다. 이 주동안의 방학은 이삼일의 울음을 담보로 한다. 아이는 여전히 엄마 아빠 품이 좋은 어린 딸이다. 조잘조잘 말하던 패기는 어디 가고 울음에 온몸을 맡긴 어린 아기가 되어버린다.
문득 생각한다. 아윤이는 이제 고작 40달을 살았다. 웃음과 울음이 반복되던 억겁 같던 주기는 사실 4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내 전 생애를 바친듯한 감각이었는데 내가 살아온 시간에 비해 턱없이 짧은, 그러나 짧지만은 않은 달들. 괜찮아, 엄마하고 또렷이 눈을 맞추기까지의 1231일들. 괜찮아, 아가하고 수없이 쓸어내린 하루들.
조금은 자신을 주장하고 또 조금은 서로를 허락하며 오늘을 맞았다. 애달픈 인내와 무한한 기쁨, 시커먼 두려움과 더없는 간절함으로 시간을 지어냈다. 네가 없는 나를 상상한다. 내가 없는 너를 상상한다. 아직은 나의 역할이 큰 탓에 내 빈자리가 더 불거져 보인다. 하지만 분명 언젠가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의 몫은 그때까지일 것이다.
며칠 아윤이는 울음으로 어린이집을 거부했다. 엄마, 보고 싶어. 눈앞의 나를 애원했다. 선생님 앞에서는 태연한 표정을 짓다가도 소매 끝으로 벌게진 눈을 닦았다. 내 앞에서는 있는 힘껏 벌리던 입을 꼭 닫고 울음을 삼켰다. 아기가 어린이가 되는 순간이다. 어린이가 된 아이는 문 앞에 마주한 선생님에게 의연한 표정을 보인다. 그리고 이내 나에게 동조의 신호를 보낸다. 나에게 무언의 갈구를 한다. 엄마 오늘 꼭 빨리 올게. 기다리던 그 말에 아이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탑을 지키는 기사라도 되는 양 굳센 표정이다.
오늘 아침 아윤이는 말했다. 나는 이제 아기 아니야. 언니야. 그러면 나는 늘 또 같은 대답을 한다. 응, 하지만 너는 늘 나한테는 아기일 거야. 너의 1일, 검붉은 얼굴을 하고 전신에 힘을 주던 그날을 난 결코 잊지 못할 테니까. 너의 배꼽과 나의 배꼽이 연결되었던 그 시간을 난 잊지 못할 테니까.
40개월, 1231일.
나의 아이는 여전히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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