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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May 10. 2023

하다 만 퇴고


 원고지 90매 분량의 소설 두 편을 인쇄하고는 읽지도 않고 우체국에 보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에게 보내길 부탁했다. 그렇다고 나에게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가 우편을 보낼 시간, 나는 실내 암벽 센터에서 손바닥에 액상 초크를 묻히고 고르고 쥐어야 할 인공 돌을 바라보고 있었다. 삼일이 지나도록 그 일에 괴로워할 줄도 모르고 전완근과 골반을 스트레칭하고 있었다.


 오 년 전쯤인가 번역을 하던 친구가 건넨 조언이 있다. 조언이라기보다 사실 협박에 가까운 말투로, 정말 진지한 마음으로 글을 쓰겠다면 마지막 퇴고는 꼭 인쇄를 한 상태에서 하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지면으로 읽으면 글의 리듬이나 맥락, 오타나 비문이 잘 보인다는 이유다. 좀 더 부드러운 어투긴 했지만 잡지에 자유기고를 싣던 지인도 같은 얘기를 했다. 어떤 글이든 마지막은 실재의 질감과 무게를 가진 종이 위에서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손바닥이 벌게지도록 돌을 당기고 민 뒤, 잠시 쉴 겸 이미 보내고 난 단편의 인쇄된 첫 페이지를 펴 들자 역시나 후회가 휘몰아쳤다. 알았으면서, 종이 위에서는 글이 잘못 기획된 영화 포스터만큼이나 다르게 보인다는 걸 알았으면서 왜 한번 읽지도 않고 보냈을까. 동의어 반복은 물론이고 조사, 단어마저 어색한 글을 보자니 틱,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자책 스위치 모드 온 ON.


일단은 차분히 생각했다. 처음으로 응모하는 출판사 공모전에 보내는 글을 인쇄해서 퇴고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실내 암벽등반을 선택했다는 게 객관적 사실이었다. 그다음은 자문이다. 그런데 그까짓 암벽등반 다른 날에 할 수도 있으면서 굳이 그날에, 그 시간에 한정된 천장 아래 가짜 돌을 그렇게 밟아댈 건 도대체 뭐야.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도 스위치는 붉게 켜져 있다.

 여태껏 나는 결코 갖고 태어나지 않은 것들을 흠모하지 않았다. 질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과 별개로 내가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들에는 엄격하다. 글에 재능이 없다 치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글을 좋아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나는 글자가 있으면 읽는다. 길가의 간판에서부터 타인의 에코백에 쓰인 영어 문구, 약 봉투에 적힌 약명까지도 모조리 읽는다. 의도하지 않아도 문자가 있으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을 흘린다. 타국의 언어라고 다르진 않다. 오히려 그 새로운 지평에 전율한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에는 에스프리 드 레스칼리에(esprit de l’escalier)라는 말이 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떠오르는 농담이라는 뜻으로 대화를 끝내고 ‘아, 아까 이렇게 말할걸!’하는 순간의 느낌을 말한다. 누구나 이런 감각을 알지만 단어로 표현되고 발음하는 건 다르다. 언어는 기존의 감각을 구체화시키고 이름 지으며 그걸 쓰는 사람 자체의 텍스트로 변환시킨다. 흔히 하는 말로 세계를 확장시킨다. 다시 예를 들자. 우리는 모두 마트에 간다. 각자의 카트에 동일하게 진열된 채소와 과일, 생필품을 산다. 그러나 각각의 저녁 메뉴와 생生의 모양은 다르다. 같은 가지로 누구는 튀김을 하고 누구는 볶음을, 또 누구는 마이크로 써서 노래를 부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더 이상 같은 가지가 아니다. 내게 언어는, 그러니까 글은 그것들을 생각하고 엮고 휘감는 일이다. 결국 무언가를 좋아하는 최상의 형태는 직접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A4 스물두 장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미완의 미숙한 본인 글을 읽는 것은 괴롭다. 거기에는 분명 고쳐야 할 문장이 있을 테고 고치고 싶지만 딱히 생각나지 않아 머리를 쥐어뜯게 되는 부분이 있음을 나는 안다. 이미 몇 번의 반복에 지친 나는 더 이상 골머리를 썩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내버려 둔다. 프린트한다. 종이 위에 얹어진 문장들은 내 눈치를 보며 에이 설마 다시 봐주겠지, 애써 침착한다. 그러나 나는 무시한다. 그대로 서류봉투에 넣어 우편으로 보내기로 한다. 자, 여기서 다시 두 번째 문단 마지막에 쓰던 글로 돌아가자. 그래. 글에 재능이 없다 치자. 그건 괜찮다. 그러나 글이 좋다면, 그래서 닥치는 대로 읽고 언어에 감탄하고 결국 직접 쓸 만큼 좋아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달라져야 한다.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펼치는 일인 동시에 싫은 것을 견디는 일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게 광물을 골라내는 일이라면 퇴고는 그것을 깎아 하나의 형태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깎는 일은 광물을 찾는 일만큼 중요하다. 글이 어떻게 또 얼마큼 세련되고 정밀하게 세공될지는 온전히 쓰는 사람의 퇴고에 달렸기 때문이다.


 자, 퇴고되지 않은 두 편은 여전히 책상 위에 고이 올려져 있다. 이제는 모든 것과 별개로 싫든 좋든 다시 그것을 들여다보고 수정하는 일이 내가 쓴 글을 아끼는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래야만 이 붉게 침잠한 스위치가 꺼질 것을 나는 아주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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