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이 하얗게 흐리더니 비가, 이내 눈이 쏟아진다. 이월의 눈. 멜버른에 있는 친구가 이월에도 눈이 와? 하고 전화너머 묻기에 이곳은 삼월의 소담한 목련꽃에도 눈이 쌓인다고, 한해의 봄이 시작한다는 입춘은 봄이 들어서는 자리가 아니라 봄이 오길 더없이 기다리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길고 어두운 밤을 보내려는 새벽이라는 단어를 닮은 지도.
아침부터 은행을 찾아 소액의 돈을 엔화로 환전했다. 아홉 시 정각에도 이미 열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금하는 사람, 대출하는 사람, 통장을 새로 개설하는 사람. 저마다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저마다의 얼굴로 창구를 바라본다. 일련의 숫자로만 등록되어 있을 전산의 얼굴들. 각자 다른 과거를 삼키고 현재를 염려할 그들의 돈과 생활 -그 간절한 이야기를- 타인은, 서로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미리 어플로 예약한 덕분에 순서가 금방 왔다. 1번 창구에 얌전히 앉아 나쓰메 소세키(노구치 히데요였던가)의 초상이 그려진 천 엔권 세장을 받았다.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삼만 원도 채 되지 않을, 애매하게 작은 돈을 받으며 창구 너머의 얼굴을 본다. 당신이 그걸로 무얼 하든 관심도 상관도 없다는 무명의 얼굴. 나는 삼천 엔이 삼천만 엔은 되는 듯 귀하게 봉투에 넣고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섰다. 은행에서 베풀 수 있는 최대의 선善은 다음 번호를 쥔 사람의 조바심을 조금이라도 일찍 끝내주는 거니까.
몇 년 전 신혼여행으로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 갈 때 친한 형(내가 형이라 부르는 사람은 딱 한 명이라 '형'은 내게는 고유명사다)이 봉투를 준 적이 있다. 결혼 선물은 못했으니 이거라도 받아두라고, 가서 이 돈으로 맛있는 커피 몇 잔이라도 마시라며 빳빳한 백 유로를 넣어준 것이다. 그것도 적절히 쓸 수 있게 50, 20,10유로를 잘 섞어서.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연히 했을 테지만) 그 봉투를 받고 느낀 고마움과 기쁨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노, 하던 엄마의 말도 틀리진 않겠으나 그보다는 어떤 선물이 좋을지 미리 마음 쓰고 굳이 시간 내어 환전한 수고가 고마웠다는 게 더 가깝다. 그때 그 돈을 어떻게 썼는지는 기억에 없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 근처에서 마셨던 에스프레소거나 바티칸 앞 올드 브리지에서 먹은 레몬 젤라토, 그것도 아니면. 하지만 뭐가 됐든 여행에서 만난 어떤 것, 그 시간이 담긴 어떤 것임에는 분명하다. 여행에 섞인 무언가.
생각해 보면 그는 항상 그런 센스가 좋다. 단 한 번의 어긋남도 없이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의 센스를 보며, 센스도 감각이라기보다 지능에 가깝다고 여기곤 한다.
아끼는 사람이 삼월에 부모님을 모시고 일본 여행을 간다는 말에 그 타국의 돈이 떠올랐다. 여행 이전에 여행의 감각을 실어주던 돈. 그리고 나 역시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 간단한 휴식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천 엔이면 네다섯의 사람이 작은 카페에서 커피 한잔씩과 케이크 한두 조각을 나누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이런 센스와 배려도 배울 수 있구나. 내게 없는 타인의 좋은 태도나 방식도 이렇게 가져다 요긴하게 쓰면 되겠구나. 참, 다행이다 하고.
일월에 그녀의 가족 여행 얘기를 하며, 삼월도 곧 오겠지요, 금방이겠지요, 말했었다. 그런데 벌써 이월도 다 지나고 곧 그녀의 여행도 금방이다. 눈이 올까. 그즈음에도 눈은 올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분명 봄에 한층 더 가까워진 봄의 눈, 삼월의 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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