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기록, 20191022
사람은 변한다.
하지만 어른이 된 후엔 경험에 대한 역치가 생겨서인지 웬만해선 끄떡없다. 인생을 흔들다 못해 엎치락뒤치락 뒤엎는 일이 아니고서야. 가령 로또 1등에 당첨된다든지 이름도 어려운 심각한 병에 걸린다던지 혹 이민을 간다던지 임신을 한다던지 하는.
이 말에 어떤 이는 로또 1등 맞은 사람의 인생 변화(특별한 것)와 임신한 여자의 것(보통의 것)이 비교대상이 되겠냐 할 수도 있겠지만 난 단언한다.
당연하다.
임신과 출산, 육아는 그 어떤 경험보다도 당사자를 흔들고 비틀고 쥐어짜서 변화시킨다. 4kg도 미처 되지 않는 아기의 탄생은 자궁을 빌려준 여자의 생을 쥐었다 폈다 하며 0으로 다시 시작하게 한다.
마치 조물조물 찰흙으로 '엄마'라는 이름의 존재로 새로이 빚는 것처럼.
몰랐다.
손가락 발가락 다 꼽아도 셀 수 없는 변화를 품어야 엄마가 되지만 그 모든 임신의 과정과 출산은 앞으로 펼쳐질 육아에 서막에 불과하다는 것을,
작은 아기 한 명의 날갯짓이 이토록 큰 태풍을 몰고 오리라는 것을 말이다.
마치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되듯 나 자신이 전혀 다른 생명체처럼 느껴질 줄은 정말 몰랐지.
나는 그대로인데,
내 안의 나는 그대로인데,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일과와 변해버린 몸, 품 안의 아가가 내 인생을 전혀 다른 물성으로 바꿔 버렸다. 번데기처럼 내 몸과 정신을 꽉 붙들고 놓지 않는다. 요동치는 감정은 번데기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사실 난 아직까지도 고등학교 2학년의 네가 잊히지 않아. 까만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 그런 네가 이제 엄마가 되다니. 시간이 지나고 어느샌가 네 딸도 고등학교 2학년이 되겠지.”
“응, 그리고 내 딸도 나처럼 엄마가 될 수도 있겠지. 이렇게 물려주는 거지 뭐. 반복되는 세월을.”
고등학교 시절 지인과 오랜만에 목소리를 확인했다. 아기를 축하하는 인사와 안부였다. 그와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우리는 이런 통화를 할지 꿈에나 알았을까. 열여덟의 우리는 그보다 딱 두배의 삶을 사는 오늘을 생각해보기나 했을까. 이팔청춘의 우리에게 지금의 우리는 너무 지루하고 평범해서 매력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미 그 청춘을 지난 터라 '그러지 않을까'하고 추측만 할 뿐 알 순 없다.
그는 바로 맞은편 아파트에 살던 동네 오빠였는데
"이런 말 한 적 없고 다시는 안 하겠지만"
하고 입을 떼었다. 내 고등학교 2학년 때의 피부색이 꽤나 기억에 남았던 모양이다.
전에도 한번 이렇게 말한 걸 보면.
"넌 참 하얬는데 이젠..."
뜨거운 시드니 태양 아래 조깅해서 탄 피부색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변명해보았지만 그저 안타까운듯한 그의 말미가 씁쓸하게 남았다. 동시에 내가 그렇게 하얬던가를 생각해보지만 역시나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일이었고 하얀 피부도 햇빛을 보면 타는 건 당연하지, 생각했다. 사람도 변하는데 피부 까짓 거 안 변하겠느냐. 하지만 그로부터도 사오 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내 하얗던 시절의, 그것도 한참이나 오래 전의 모습을 이야기하다니.
신기하게도 사람의 기억이란 지나온 그 오랜 시간 중 몇몇 순간들만 반딧불이의 불빛처럼 기록하는가 보다.
깜박깜박, 그 언젠가의 빛나던 모습으로.
하지만 정작 내가 나의 여고 시절을 떠올리려니 너무나 감감하다. 그랬던가 저랬던가 아무것도 확실치가 않다. 역시 반딧불이의 불빛처럼 깜박깜박 어느 날의 일들만 편집되어 떠올려질 뿐이다. 그것도 아마 나 좋을 대로 식의 기억이겠지.
이젠 나의 것보다 내 딸의 것이 더 가까운 고등학교 시절, 이려나.
사람은 변한다.
번데기의 시기를 지나면 훠얼훨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것이다.
그리고 한때 하얗던 피부도 까맣게 타면 돌아오지 않는다.
적어도 내 경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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