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큰하게, 도륙된, 성근 눈, 연마되지, 광휘, 소슬한.
'소설가 한강 작품 속 미친 어휘 모음'이라는 sns 피드에서 나온 낱말들이다. 입 밖으로 내 본 적 없지만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은 말들. 같이 물가를 걷던 언니에게 불쑥 이 단어들을 말했던 건 아무래도 그날의 하늘과 바다가 <작별하지 않는다>의 분위기를 닮았기 때문이겠지. 밀어 치는 바다와 곧 다가올 폭설의 예고 같은 것 마저도.
언니, 도륙이라는 말 써본 적 있어?
언니는 저 어렸을 적 신문에는 한자들이 많았다고, 도륙도 한자로 된 언어라 그때엔 자주 사용되곤 했다고 말했다. 자, 시리얼 킬러가 있다고 생각해 봐. 지금의 우리는 그저 연쇄살인마 라고 하겠지만 그때엔 커다랗게 '인간을 도륙하는 인간'이라는 문구로 신문을 도배했어. 8,90년대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제는 그런 일이 사라져서 낯설어진 걸지도 모르고. 나도 기억한다. 읽지도 못하는 한자가 즐비하던 신문과 어른이 되면 저 많은 한자를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던 의심. 하지만.
아직도 어디에선가 사람은 도륙되고 있지 않나.
전쟁은 사라지지 않았는 걸. 인간의 도륙은 끝나지 않았어.
하긴 그렇지. 하지만 그런 말도 있지. 개인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다수를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참 싫은 말이야.
말도 안 되는 말이지.
비나 눈이 올 것 같은 날씨였다. 물이 들어오고 빠지는 대로 밀려난 껍데기들. 흰 조개껍데기 무덤을 밟으니 아삭아삭 씹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섬을 돌아 우린 그곳까지 갔다.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인가를 걸으며 끝말잇기처럼 낱말을 뱉으면서.
쇠퇴한, 을씨년스러운, 쓸쓸한, 쇠락한, 녹슨.
어딘가 기울어진 닮은 단어들을 바다에 던졌다. 던질 필요도 없었다. 흰 포말이 단어를 끌고 물에 들어갔다. 자연은 멋지네, 장대하네, 거대하네, 대장부네. 쿠르베가 갓 그린 듯한 배경을 앞에 두고 새로운 낱말잇기가 시작되었다.
그날 밤 눈이 펄펄 내렸다, 다음날 저녁까지. 117년 만의 11월 폭설이라고 했다.
그곳은 얼마나 흴까, 고요할까, 적요할까, 소리는 모두 침잠했을까.
눈을 감고 소슬한 물가,라고 발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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