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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물과 눈물

by 윤신



고여 있던 빗물에 눈이 닿아 사라진다. 첫눈이었다.

첫눈,

이라고 발음하면 어딘가 쑥스러운 첫 고백이 떠오른다. 공책을 찢어, 사실 나는, 으로 문장을 적어 내려간 열셋의 여름. 얼굴이 희던 그 아이의 책상을 몇 번이나 힐끔대고서 결국 전하지 못한 구겨진 고백 같은 것.


첫으로 시작되는 단어는 서툴거나 미완인 채로 남겨진 것들이다. 첫눈, 첫걸음, 첫인상, 첫 계절, 첫째 아이, 첫사랑. 뒤돌아 붉어진 아이의 볼이나 하굣길 상자에 담긴 병아리의 털처럼 수줍고 애처로운 처음들. 첫- 이라는 관형사는 그렇게 너무나도 조심스러워 제대로 쏟아내지도 쓸어내리지도 못하는 세상 모든 것들의 상징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며칠 전, 첫눈이라는 이름으로 이틀 동안 폭설이 내리기 전까지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설탕처럼 눈이 녹는 물웅덩이를 피해 가며 아이와 길을 걸을 때였다. 신난 아이는 달래달래 걷다 문득 얼굴을 들어 나를 보고 엄마, 이건 뭐라고 불러? 하고 물었다. 영하로 온도가 떨어지기 전 내려 고인 빗물이었다.


응, 그건 빗물이야. 비가 모인 물이라는 뜻이지.

비물?

아니 빗물. 이렇게 말들이 합쳐질 때면 앞글자 받침에 시옷이 들어가기도 하거든.


나는 다섯 살 아이에게 사이시옷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던가. 아, 그렇구나. 아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조물조물거리며 속삭였다. 반짝반짝 빛나서 그런가 봐. 나는 가만히 아이의 말을 따라 했다. 반짝반짝 빛나서 그런가 봐. 그리고 다시 빗물을 봤다. 빛을 받아 찰랑이며 빛나는 빛물이 거기 있었다.


우리에게는 자주 그럴 때가 있다.

안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때.

모든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터질 듯 끌어안고 싶을 때.


그러네. 빗물은 흙투성이일 때가 많지만, 그 어떤 빗물이라도 빛을 받으면 함께 빛나네.


흰 모자, 흰 옷, 흰 목도리, 흰 이불. 모든 흰 것을 연상시키던 눈은 종일 내려 그 빗물에 섞여 들었다. 빗물, 빛물, 되뇌다 그러면 눈이 녹아 모인 물은 눈물이 되는 건가 생각했다. 바닥에 고여있는 눈물, 길가에 흐르는 눈물. 불현듯 <여름 끝물>이라는 시의 끝구절이 떠올랐다.


'우는 사람에겐 더 큰 눈물을 선물하고 싶다.

어느 것이 자신의 것인지 모르게'


겨울은 눈물을 흘리지는 않지만 눈물은 생겨나 모인다. 저도 모르게 모인 겨울의 눈물은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겨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추위를 잘 견디지도 못하는 데다 겨울이면 꼼짝없이 감기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지방에서는 눈이 귀했고 온다 한들 다음날이면 질퍽하게 녹아 곧장 구정물이 되곤 해서 어릴 적 눈이라고 하면 찻길가에 길게 쌓인 눈을 꾸욱 꾹 밟던 기억이 전부다. 그런데 이곳의 겨울은 온통 눈이다. 바다 위로 스미는 눈, 누구도 밟지 않은 두텁고 흰 눈, 흰 숲의 고라니, 휘몰아치거나 고요한 눈의 정적.


올해의 첫눈을 보며 하긴 처음은 이런 모습도 어울리겠네, 싶었다. 서툴러서 조절이 안 되는, 당혹과 놀람 사이에서 휘청이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무작정 쏟아내기만 하는, 조심스러운 만큼 급작스러운.

조용히 묻혀버리는 첫 고백이 있다면 분명 어딘가에는 '난 널 사랑한다고!!!!!!!!!!' 하는 고함의 고백도 있을 테니까. 꼭 허둥지둥 대면서도 힘껏 첫눈을 날리는 저 겨울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겨울이 밉지 않다. ‘나를 봐! 이제 겨울도 시작이라고!!!’ 하는 그의 고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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