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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을 쓸면 다가오는

by 윤신



쪼그려 앉아 네 잎을 찾는다.

공벌레처럼 몸을 말아

풀잎에 파묻힐 정도로 깊고 아득히.


이 것은 이 계절 나의 여흥이다. 풀밭 가까이에서 몸을 낮춰 네 잎을 찾는 것. 아마도 시작은 내 나이 여덟아홉, 할머니 집 앞 공터에서 시간을 쏟던 유년에서 이어진 일과일 것이다.


킁킁 산책하던 개가 물끄러미 나를 본다.

나도 개를 본다.

이제 가야지, 사람이 개를 다그쳐 개는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발을 움직인다.

나는 그대로, 개는 멀어져 간다.


네 잎을 찾기 위한 방법은 단순하다. 네 잎을 세 잎의 연속이라 여기지 않는 것. 네 잎은 개별적이다. 수풀에 웅크린 동물처럼 눈으로 풀을 쓸다 보면 순간적인 형태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것이 저만의 대칭을 가진 사각형인지를 확인한다. 잎 하나가 유난히 작아 조금 비뚤 수는 있지만 네 잎은 대략적으로 안정적인 구도를 갖는다. 틈 없이 단단한, 얇고 푸른 네 장의 잎. 집을 나선 지금도 몇 개를 찾아 책 사이에 끼워두었다.

벌레에게 먹힌 것, 잎 하나가 다른 잎의 1/4 만한 것, 색이 바랜 것, 보통의 것.


네 잎 클로버는 토끼풀 속의 기형이거나 생장점에 생긴 상처가 원인이 된다고도 한다. 상처에서 자란 잎. 누군가의 상처나 각각의 불행이 행운이 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전혀 관계없는 사람의 경우에도 그럴 수 있을까. 길을 걷다 만난 찰나의 네 잎 클로버처럼 순간적인 행운을, 이방의 불행이 건넬 수가 있을까.


개가 떠난 자리를 보면서 나는 아직도 가만히.


지난달 본 친구가 보내 준 영상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무 못난 상황에 있다고 해서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처음에는 몰랐던 말의 깊이가 두세 번 듣고 나서야 울린다. 그는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의 못남도 전제하지 않은 것이다. 자주 나 자신에게 던지고는 하던 말, 내가 부족해서, 내가 모자라서, 내가 미워서, 내가 못나서 를 그의 식으로 바꿔본다. 내가 부족한 상황, 모자란 상황, 미운 상황, 못난 상황. 적고 보니 어쩐지 지금을 버티고 벗어날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이 상황만 지나면 견딜 만해질 것도 같다. 무심코 새어 나오는 말의 이토록 강력한 힘이라니. 이어 그는 말했다.


'사람이 그늘이 있어야 또 다른 사람이 쉴 수 있는 품이 생기니까. 태양만 쬐고 산 사람들은 그런 넉넉함이 없어요.'


누군가의 아픔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안길 수 있는 품이 된다는 것.

내가 숨겨둔 상처가 누군가에게는 울 수 있는 무릎이 된다는 것.

알 수 없는 불행을 상상하고 감싸 안으려는 힘은 나의 지난 불행에서 나온다는 것.

모르는 이의 손을 붙잡고 같이 우는 마음은 저마다의 생장점에 새겨진 상처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

태양의 환함보다 때로는 어두운 구름이 휴식이 되기도 한다는 것.

세상에는 빛의 그늘로 무늬를 그리는 잎도 있다는 것.


개도 사람도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쪼그린 채로 고개를 돌린다. 저녁의 나팔꽃처럼 한껏 몸을 오므린 채

아마 이 한철 지나도록 그럴 것이다.

은녹색의 뭇풀이 바람에 흔들린다.






영상 원본

https://www.youtube.com/watch?v=BzmbpDHM4GU&t=135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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