얕은 여름의 언덕에서 길을 잃었다
밤도 아닌 며칠의 낮
매끈한 고라니의 등을 바라보다
사진 찍어야지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면
이내 달아나 사라지곤 했는데
뛰어가는 짐승의 등이 아름다워
그 뒤를 쫓아가던 인간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말하기도 미처 알기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
사라져서 아름다운 것
사라져서 미화되는 것
이른 아침의 나는 분명
적당한 소금을
적당히 익은 토마토에 뿌리며
적당한 산책을 원했을 뿐인데
또 길을 잃었다
이런 일이 허다하다
오늘에서 어제를 발견하는 일에서
어제에서 미래까지가 범람해 헤매는 언덕
멀어지면 선명한 일들과
깨우고 싶은 뱀의 오수
나는 언제야 멀어질 수 있을까
혼자 묻다가 깜짝 놀랐다
멀어지고 싶구나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길이 아닌 길을 걸으면서
헤맴과 헤맴이 아닌 것은 나의 결정이라 과신하면서
어차피 이 모든 것의 원흉은 나의 이름 때문이야
사람은 이름 따라 살아간다니
믿음과 이름은 둘 다 내 안에서 시작된다니
범람하는 믿음*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을
아무도 원망하지 않으면서
나의 발밑에 유리조각을 뿌려대던 나의 지난 사랑들
그러나 믿음은 사람과 말 사이의 일
언덕이나 고라니는 상관없지
두 시간쯤 걸으니 길이 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길은 사라져 있다
있었던 적도 없던 듯
자신은 어차피 길이 아니었다며
태연하고 말갛게 사라져 있다
*믿을 ‘信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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