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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의 감각

by 윤신



오르고 내린다. 한참을 어딘가에 몰두하다가, 그것만이 생의 전부라고 여기다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주위를 보면 거대한 파도가 치는 세상이, 버터향 가득한 언어들이, 지독하게 제멋대로 잘난 무언가가 가득하다. 알지 못하던 것들에 눈이 시리다.


물살을 밀고 당기며 수영하던 아침, 며칠 전의 낮잠을 떠올린다. 오랜만에 휴일인 그가 먼저 빠지고 차례를 기다려 풍덩, 물에 빠지듯 잠겨든 낮잠. 시원한 뺨과 따뜻한 이불속의 대비는 다비드의 비율만큼이나 아름답고 달콤하다. 살짝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도 아직 낮인 세계에서 적당한 죄책감과 안도를 느끼며 책을 읽고 식물에게 물을 주고 청소를 했다. 해야 할 것들에 대한 조급함은 잠시 내려놓은 채였다. 하든 하지 않든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보통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이런 때엔 요긴하다. 하지 않는다 한들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을 것 - 딱 그 정도의 감각이었다. 충실한 낮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불특정의 시간처럼 평범한.

그런데 오늘 아침, 물에 누워 푸른 타일을 응시하던 와중 그때의 낮잠이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누워있는 것이 침대라는 듯, 싸여 있는 것이 이불이라는 듯. 편안하고 고요한 아주 충만한 어떤 감각으로.


어제 아이는 물었다. 만족한다는 건 어떤 뜻이야? 음, 그건 어떤 일을 하고 나서 네가 그 일로 기쁘다는 뜻이야. 더 하지 않아도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야. 어린아이들은 단어의 의미를 꽤나 자주 어른에게 묻고, 나는 그 순간마다 나의 입으로 뱉어진 단어들의 뜻을 새로이 감각한다.


그때 난 낮잠에서 깨어 뭔가가 깨끗하게 사라졌음을 알았다. 늘 부족해하며 애태우던 시간이 사라졌으나 시간은 아니고 딱 그만큼의 뭔가가 사라졌음을. 말끔하고 사뿐하게. 기분이 좋았던 걸 보면 분명 어떤 내 안의 나쁜 무언가가 있던지도 모르게.


낮잠=시간을 버리는 일, 이라는 공식을 세우고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흘러넘치지만 내 안은 캄캄하게 어둡던 스물의 몇 살쯤, 자주 잠에 빠져들었다. 꿈은 현실보다 견딜만하고 골치 아플 일도 없고 낮이든 밤이든 잠을 자면 시간이 갔으니 시간을 버리기에 딱 좋은 일이었다. 아마 그 시절 때문일 것이다. 그때 버린 시간을 살아내려면, 또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내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여기는 것은. 한낮 잠들고 나면 사라지는 시간들이 이토록 아깝게 여겨지는 것은.


하지만 나는 며칠 전의 낮잠을 충실하다고 적었다. 충만하다고 적었다. 그 낮잠의 감각이 전혀 아깝지 않았으며 (아이에게 만족을 일렀던 것처럼) 그대로도 좋다고, 그대로도 충분하다고 말이다. 겨울의 곰처럼 이불에 파묻혀 웅크리던 기쁨이 다시 일렁인다.


올라가든 내려가든. 해야 할 일은 하고 가끔은 한발 짝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기도 한다. 구원에도 그림자가 있고 지옥에도 빛이 있으니 가까이한 일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으로,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안도로 살아간다. 입을 벌리고 그저 황홀해하며 순간을 있는 그대로 감각한다.


내가 있는 곳이 진창이더라도 나는 그럴 것.

이것은 기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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