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겸 책상에 앉아있다. 태어나자마자 여러 역할을 맡는 사람처럼 우리 집 거실의 탁자도 하나 이상의 몫을 갖는 셈이다. 화분 받침대로, 읽다 만 책이 쌓인 책장으로, 저녁 식탁으로, 고양이 놀이터로, 주로 내가 글을 쓰거나 읽기 위한 공간으로. 하루 몇 번이나 얼굴을 바꾸는 탓에 흰 샤워실빛 책상 위가 자주 어지럽다. 지금도 티팟과 컵, 열한 권의 책이 있고 그 사이로 초록의 식물, 작은 화병, 수제 사탕, 초콜릿, 립밤 같은 것들이 순서 없이 섞여 있다. 깨끗이 정리되지 못한 살림과 생활의 파편들이다.
이것을 정리하고 다음엔 저것을. 그러다 보면 햇볕에 얕게 쌓인 눈이 녹듯 한낮이 사라져 있다.
나는 매일 탁자의 흰 상앗빛이 눈에 더 들어올 정도로만 정리한다. 뭐든 지나치면 유지하기가 어렵고 지금의 혼란이 나에게는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책상 위로 시간이 쌓여 있다. 지난달에 읽다 만 시, 읽을 그림책, 때때로 쓸 휴지, 일 년 동안 쓴 플래너. 그리고 2주 전에 받았음에도 싱싱히도 피어있는 작은 꽃 몇 송이. 아까 줄기의 끝을 조금 잘라 물을 바꿔 갈았더니 그 물을 마시고 한층 더 싱그러워진 페니쿰, 보리사초, 거베라, 알스트로메리아. 식물의 이름을 부르다 보면 입에 물을 머금는 것 같다. 식물의 이름보다 더 고요한 말은 없다. 이렇게 책상 위 살림의 나열만으로도 나는 꼭 잘 살고 있는 것만 같다.
삶, 이라는 단어를 가만히 본다. '살다'에서 왔다는 말이 있지만 내 눈에는 '사람' 같기도 하고 '살림' 같기도 하다. 살려면 사람도 살림도 있어야 하니까, 사람이 살림을 하면 어떻게든 살아지게 되니까. 누가 우울에 특효약은 아침 일찍 일어나기와 청소라고 했나.
내가 앉은 곳은 내가 사는 곳이다. 물을 주고 대화하고 소리 내서 웃고 앉고 서고 가끔 쓰러지기도 하는 곳. 매끈한 책 안에서 벌어지는 일과 책 바깥의 촉감 가득한 일이 동시에 벌어지는 곳. 식탁과 책상.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꽤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주저 없이 식탁을, 인간의 본능인 씹어 삼킴을 넘어 같이 먹고 살아내는 쪽으로 선택할 것 같다. 도서관 속의 지식보다 시장 할머니의 철학을 믿는 사람으로서, '책에 밑줄 긋는 일보다는 풀 뽑는 일이 천배 만배 성스'*럽다는 시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람으로서. 그러나 그 누구도 내게 선택을 묻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의 탁자는 오늘도 제 역할들을 공평히 해내고 있다.
*풀 뽑는 사람,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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