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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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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Aug 05. 2020

겨우살이

우리의 기록, 20191129




겨우살이는 쌍떡잎식물로 대표적인 기생목이다. 

참나무, 물오리나무, 밤나무 등의 나뭇가지에 붙어서 그 나무의 수액을 빼앗아 살아간다. 


난 겨우살이가 싫었다. 잘 알지도 못했지만 그저 어감이 싫었다. 좋은데 이유가 없듯 싫은데도 이유가 꼭 있어야겠냐만은 굳이 꼽자면 겨우겨우 근근이 버티며 살아가는 이름이다. 거기에 기생목이란 걸 알고는 더 얄미웠다. 제가 땅으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할 것이지, 남이 만든 영양소를 뺏는 건 또 뭐야. 



올해 더운 여름, k 현대미술관 어느 전시에서 겨우살이를 주제로 한 작품을 본 적이 있다. KISS, LOVE MOMENT라는 주제에 대한 각기 다른 작가의 창작물이 모인 전시였다. 그중 형형색색의 호스와 체인이 엉키고 설켜 바닥에서 천장까지 뻗은 인공 나무에 작은 전구들이 매달려 빛나는 설치물이 바로 겨우살이였다. 



"웬 겨우살이야, 이 테마에."

"외국에선 겨우살이 밑에서 연인이 키스하면 행복해진다는 말이 있잖아. 왜, 영화에도 많이 나왔는데. 러브 액추얼리에서도 나오고."



그랬던가. 기억이 없다.  

궁금증이 일어 인터넷에서 찾았다. 그녀 말대로 미슬토 Mistletoe 라 불리는 겨우살이는 서양에선 평화, 사랑을 뜻했다. 처음 사진으로라도 보게 된 겨우살이는 연한 초록의 둥근 잎과 구슬 모양의 작고 노란 열매가 귀여운 식물이었다. 추운 겨울에도 잎을 떨구지 않고 살아가며 그 구슬 같은 열매를 먹고 새들이 겨울을 난다고 하니 뭔가 고맙고 애틋하게까지 느껴졌다. 



밤송이가 떨어지듯이 툭, 하고 문득 겨우살이가 생각났다. 

제 힘이 부족하면 누군가의 힘을 빌려 이겨내면 된다는 마음이 들어서일까. 버티며 살아가는 生에 대해 생각해서 일까. 어차피 우린 어떤 방식으로든 남의 영양분을 흡수하며 살아가서 일까. 

남의 나무에서 버티고 버텨 새들에게 또 버틸 힘을 주는 겨우살이가 생각났다. 

그렇다. 버티는 것도 ‘힘’이다. 



며칠 전 검사한 자궁경부암 결과가 좋지 않다는 문자를 오늘 받고는 가슴 언저리 어딘가가 철렁, 내려앉았다. 반복은 사람을 무감각하게 하지만 두려움을 없애지는 못한다. 호르몬 저하(=무기력) 탓인지 이제는 '될 대로 돼라'라는 마음이 들던 중 무심코 아가와 눈이 마주친다. 이 없는 잇몸을 보이며 헤헤 방긋방긋 웃는다. 



체한 듯 가슴 언저리에서 뭉쳐져 있던 검사 결과 문자를 가슴에서 쓸어내린다. 두려움, 포기, 나약함을 녹인다. 간사하게도 조금 마음이 풀어지니 되려 눈물이 쏟아졌다. 방싯 웃는 찰떡이를 안고 한참을 엉엉 울었다. 진정이 되고는 아가를 바운서에 내려놓고 조그만 손을 꼭 잡았다. 벌건 눈으로 아가를 찬찬히 바라보며 처음 그 진단을 받은 날이 떠올렸다. 서늘한 가슴 아래 두 가지 후회가 퐁퐁, 솟던 날이다. 막다른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이 들면 못해본 일, 아쉬운 일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 두 가지 후회란 제주도에 가보지 못한 것과 아가를 갖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난 올 4월 찹쌀떡 군과 제주 푸른 바다 곁에 핀 노란 유채꽃을 보았고 8월, 건강한 찰떡이를 만났다. 보드라운 아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어와 목적어가 생략된 문장을 연신 되뇌었다. 넌더리 나게 지쳤던 엄마의 손을 아가가 온 힘을 다해 꼬옥 잡곤 웃는다. 

이제 또 하나의 오르막 길에 들어선 지금, 후회는 다짐으로 바뀌었다. 



건강해야 한다. 아니 이미 난 건강하다. 



겨우살이는 광합성을 할 수 있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다른 나무에 기생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새들과 다양한 생물의 삶을 잇는다. 그리고 차디찬 겨울을 버티어 봄을 맞이한다. 

이래저래 몸도 맘도 약해진 나 역시 타인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한없이 지칠 땐 순간을 버티며 살아간다. 모두 곁을 지켜주는 이들 덕분이다. 나 역시 꽃을 피워 타인에게 힘이 될 열매를 부지런히 맺어야겠다. 누군가의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철학자 김진영이 남긴 글로 오늘 일기를 맺는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병에 대한 면역력이다. 면역력은 정신력이다. 최고의 정신력은 사랑이다.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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