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엄마들의 유희 시간』2장
엄마들에게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보다 이전에 왔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인해 학교와 학원 모두가 문을 닫고 집안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초기 코로나에 대한 공포는 어느새 사라지고 약간은 무던해진 일상이 시작되었다. 아이들도 집안 생활의 루틴을 잡아 내가 잠깐의 여유를 부릴 정도의 시간도 생겼다. 그 무렵 아침, 점심, 저녁 끼니를 챙기고 청소하고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에는 이상하게 밤에 잠을 안 자고 새벽까지 깨어 유튜브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줄어든 수면 패턴의 변화는 낮잠을 잠시라도 자야 하는 하루 패턴을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갑작스러운 공포감에 휩싸였다.
내일에 대한 공포와 우울감이 내 삶에 파고들었다. 우리의 삶은 이미 불확실성 속에 놓여 있게 되었고, 무언가를 계획하거나 달려 나갈 수 있는 삶의 영역이 줄어들었다. 이런 시기에 엄마로서 아이들을 돌본다는 것은 많은 리스크(risk)를 지닌다. 코로나로 인해 생길 위험에 대한 공포보다 불확실성 속에 삶에 주도권을 잃는 것이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흔히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자기 자아의 욕구를 내려놓고 타인의 욕구에 먼저 반응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엄마가 되고 나서의 10년의 시간을 돌아보면, ‘엄마가 된다는 것’은 삶에 주도권을 놓는 일이었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밤잠 설쳐가며 아이를 돌보고 재우고 입히고 씻기는 것이 내가 먹고, 입고, 자고, 누군가를 만나는 일에 앞서 있었다.
내 삶의 우선순위
코로나와 1년여 살아온 엄마들에게 코로나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우리는 코로나가 내 삶을 바꿔놓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함께 모인 엄마들에게 코로나로 인해 바뀐 것은 없었다. 돌봄 노동의 강도가 조금 더 세진 것이지 삶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줄어든 내 시간으로 인해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가 달라졌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나에게 가장 소중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아이를 키우며 바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의 삶에 있어 내 삶에 소중한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삶의 큰 기쁨과 에너지를 준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좋은 추억과 서로에 대한 신뢰, 그리고 서로를 향한 응원은 내가 누구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 준다. 무엇보다 다양한 정체성을 지녔지만 엄마로만 열심히 살아왔던 나 자신과의 만남은 내 안에 한 인간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갈망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 내일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상황에서 내 안의 우울과 공포는 내 삶의 주도권이 부재함을 알려주는 알림이 되어주었다.
열심히 살기의 함정
코로나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중 또 다른 하나는 내가 그동안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열심히 살아왔다는 사실이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박사과정에 들어갔고, 수많은 과제들의 압박 속에서 매주 하루 종일 듣는 수업시간을 맞추려고 발을 동동 거렸었다. 부탁하기 싫어하는 딱딱한 성격의 내가 아이들을 돌봐달라는 부탁까지 하며 4학기를 마쳤다. 공부의 시작은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고, 내 기쁨과 재미를 위해서였다. 도전하는 것이 재미있고, 무언가 배운다는 것이 엄마로만 사는 것에서 해방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하지만 열심히 달려온 마지막 학기에 절망감을 맛보았다. 내가 열심히 달려오다가 어느새 방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 너무 바보같이 열심히 살았어.’
코로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었기에 그 이외의 것들은 잠깐은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시킬 수 있었다.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해도 “괜찮은” 시기는 나에게 온전한 쉼을 제공해주었다. 뒤쳐질 것 같은 두려움, 잘 해낼지 못하면 비난받을 것 같은 좌절감,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보다 “해야만 한다고” 나를 채찍질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열심히 사는 것은 때로는 시작했던 마음과는 달리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다른 사람의 인정과 사랑과 관심으로 인해 움직였던 내 삶이 이제는 그 외면하기 힘들었던 목소리들로부터 조금씩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한 내 안의 목소리에 기울이기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