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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 Jul 04. 2021

[일상의 단상]-<경계를 넘어선 재창조의 미학>

*경계를 넘어선 재창조가 무한하기에 예술은 더 아름답다.*

[일상의 단상]-<경계를 넘어선 재창조의 미학>

*경계를 넘어선 재창조가 무한하기에 예술은 더 아름답다.*


#명화 모티브 재창조


#의상디자인


[‘인간의 예술활동’에 대한 단상]


인간이 예술행위를 하기 시작한 최초의 시작은 언제쯤이었을까?

문자 이전 시대였던 고대 벽화에서 발견되는 그림들은 당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추측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글자나 숫자 등의 문자가 없던 그 옛날에 수량을 세거나 약속을 알아볼 수 있도록, 의미있는 기호로 표시하기 시작하면서 형상화한 ‘상형문자’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것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기하학적인 문양이 있고, 또 어떤 규칙을 갖고 있는 일관된 문자도 있다.

이후로 인류의 문명은 끊임없이 발전하였다. 각 시기마다 당시 사람들이 향유하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그림 속에서는 악기로 추정되는 형태의 물건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춤추고 노래하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한 장면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란 존재는 춤추고 노래하며 내면의 흥을 표현하고 싶어 했으며 자연과 융화되어 풍류를 즐길 줄 알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이 그림을 그리고 춤추고 노래하는 예술행위를 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인간의 직립보행과 깊은 관련이 있을듯 하다.

어떤 진화론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태초에 인류의 골격은 본디 ‘사족(四足)보행’에 맞게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인류가 네 발로 걷는 여느 동물들과 차별화되게 특별한 존재로 거듭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혁명적인 변화이자 큰 축복이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어느 순간부터 ‘네 발’에서 ‘두 발’로 걷게 된 인간의 변화는 인류가 다른 생명체들과 구별되게 하는 ‘문명’을 가능하게 한 역사적 기점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른 유인원들과는 달리 두 발로 걷기 시작했고 두 손을 사용할 줄 알았기 때문에 시작된 변화는 일일이 나열하기 불가능할 만큼 어마어마할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직립 보행을 시작하고 손을 쓰게 되면서부터는 그 이전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뇌에 공급될 수 있었기에 계속 두뇌가 발달하게 되어 더 지혜로워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두 발로 걷고 뛰면서 이동에 용이하게 된 기능적 측면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고, 걷는 것이 차차 지루해지고 따분해져서 춤을 추게 되었다고 하는 설을 듣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를 추구하는 인간이 귀엽게 느껴져서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는데, 생각할수록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차차 각종 악기를 만들어 음악을 즐기게도 되었고, 신체활동이 좀 더 세밀하게 발달하면서 두뇌가 계속 진화하게 되니 차차 심미적인 개념에도 눈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그림으로도 표현하게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데, 이렇듯 인류의 문명이라는 것은 그림, 음악, 노래, 춤 등의 다양한 신체표현 그리고 더 나아가 서사와 문학으로까지 각 분야의 예술로 끊임없이 발전하게 되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예술이라는 것은 그 분야에 있어서 경계를 명확히 지을 수는 없는 특성을 갖고 있다. 우주공간으로 로켓을 쏘아올리고, 인간이 우주선을 타고 다른 행성에 가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해질 정도로 과학과 기술이 발달할 만큼 발달한 오늘날,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컴퓨터 등 새로운 매체를 활용하여 문화예술로 표현하는 방법과 그 영역이 무한대로 넓어지면서 지극히 창조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니 더 이상 예술의 각 영역이 독자적인 분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상호융합하면서 종합예술의 형태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현재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이 융합한 가장 대표적인 형태로 꼽을 만한 것이 ‘미디어아트’이기도 할텐데, ‘미디어아트’는 컴퓨터를 활용한 디지털 매체의 발달에 힘입어 예술의 경계를 허물어 융합의 영역으로 조화롭게 확장시키며 끊임없이 발달하고 있다.

그래서 음악, 미술, 문학, 춤에 이르는 예술의 각 영역과 기술을 조합하여 매우 감성적인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나가는 신선한 시도가 많이 생겨나고 있고, 심지어는 작가가 시작을 하고 전개해 가다가 그 작품의 완성에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특별한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듯 융합예술의 끝이 어디까지일까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게 계속 다른 모습으로 진화해 나가고 있는 모습이 흥미롭기만 하다.


나는 문학과 미술, 그리고 음악 등에 평상시 지대한 관심과 개인적인 선호를 갖고 있으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즐겁게 향유하고자 노력하며 사는 1인으로서, 현대 예술의 트랜드인 ‘융합예술’에 대해서도 늘 관심어린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글을 쓰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각종 영화와 공연을 관람하면서, 감성적인 갈망을 채우며 많은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것은 크나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예술의 각 분야별로 형식의 차이가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 차이는 너무도 지엽적인 관점에서 생각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시각적이고 청각적이고 하는 표현의 방식이 조금씩 다를 뿐 인간을 정서적으로 토닥여준다는 면에서 모두가 그 결을 같이 한다. 큰 틀에서 보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는 인간의 예술활동이라는 면에서도 그 뿌리가 같다. 그래서 화가와 작가가 서로 교류하며 친구가 되고, 음악가와 무용가가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는 경우도 많은가 보다.


얼마전 한 미술전시회에서 찾아가 관람을 했는데 그 전시장에서는 음악이 흐르는 있었다. 융합예술이 보편화 된 현대사회에서 ‘음악이 흐르는 전시회’, ‘미술과 음악의 콜라보 전시회’가 기획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

나는 그림 보기를 즐기며 특히 명화를 좋아한다. 미술 전공자도 아니며 그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림을 볼때 그저 내가 보고 힐링되는 지점을 발견하며 내 식대로 느끼며 즐긴다. 특히 명화를 감상할 때면 뭔지 모를 안정감을 느끼게 되면서 정서적으로 평화로워지게 된다. 그 느낌은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릴렉스되면서 찾아드는 평안함과 일맥상통한다.


어느날 웹서핑 중 우연히 발견한 한 커뮤니티의 포스팅이 참 인상적이어서 다운로드해 두었다. 명화에서 느낀 이미지를 발췌하여 그 색감을 적용한 의상디자인들의 콜렉션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명화들 속의 컬러와 이미지의 포인트를 어찌나 잘 짚어내어 현대의 의상디자인에 감각적으로 적용을 했던지 참신하기도 하면서 그저 감탄스러웠다.

이렇게 최초의 원작자는 감각적인 인식을 통해 캐치한 어떤 심상을 불멸의 예술작품으로 표현해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최초의 원작을 바탕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며 재구성하고 재창조해 낸다. 그렇게 원작자의 최초 작품은 뒤이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깨달음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원작의 예술가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그런 위대한 작품들을 남기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고민과 숙고의 시간을 보낸 이후에야 힘겹게 얻은 예술적 영감을, 가시적인 결과물로 형상화해 내려고 시도하며 끝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작품을 완성해 냈을 것이다. 또한 계속해서 보완하고 좀 더 나아지려고 무진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만큼이나 ‘재창조’의 영역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는 모든 분야에 있어서 발전의 극한까지 다다른 듯한 착각이 들 만큼 모든 분야의 발달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면서, 어느덧 ‘4차산업혁명’ 시대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인간이 계속해서 창조적인 것들만을 만들어내기에는 한계가 분명히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융합’, ‘재창조’, ‘패러디’ 등과 같이 처음의 것에 또다른 창의력을 가미해 새로운 것들을 다시 만들어 내는 작업들도, 새로운 예술기법인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또다른 창조’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렇듯 경계를 넘어선 재창조가 무한하기에 예술은 더 아름답다.

더이상 각 예술 분야별로 명확한 경계를 규정짓는 일이 무의미해졌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을 때, 훌륭한 예술작품들이 지속적으로 탄생한다는 것을 현대사회 곳곳에서 느낄 수가 있다.

오늘도 각 예술분야에서 불철주야로 고군분투하며 창조의 고통을 겪고 있을 수많은 예술가들이, 되도록 배고프지 않은 상황에서 작품활동을 해 나갈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도 가져본다. 특히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쫓기보다는 오직 인간이기에 향유할 수 있는 예술활동에 가치를 부여할 줄 알기에, 창조의 작업에 기꺼이 자신의 영혼을 갈아 넣으며 젊음과 열정을 바쳐 투신하고 있는 각 분야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다.


*명화를 모티브로 재창조한 이 의상디자인의 원작자는 알지 못하여 부득불 무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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