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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Sep 08. 2020

자살과 시계에 관한 단상

"오직 자살만이 인생에서 생각할 만한 문제라니까."

K가 소주를 들이켜면서 말했다. K가 술을 들이켜는 모습을 보자니 건너편까지 씁쓰레한 알코올 향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것 같았다. K는 안주를 그득그득시켜놓고도 한 젓가락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에는 어딘가 안주를 안쓰럽게 여기거나, 하찮게 여기거나 둘 중 하나의 미묘한 감정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그 정도로 관념적인 인간이었다. 알코올의 본질적인 관념을 위해선 안주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건너편에서 그녀가 시켜놓은 안주를 입안 가득히 쑤셔 넣어야 했다. 

그렇게 말하고는 가만가만 내 반응을 살피었다. 마치 자극을 준 뒤 생쥐의 반응을 관찰하는 연구자와도 같은 눈이었다. 나는 괜스레 멋쩍어져서 마치 듣지 못한 척 부대찌개의 햄을 향해 젓가락을 놀렸다. 하지만 그걸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내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작은 손이 매의 아귀처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소주병-새로 나온 파란색 병-을 향했다. 병을 잡고는 소주잔 가득 넘치게, 심지어 몇 방울은 테이블 위로 넘쳐흘렀다. 아까워하는 기색 없이 양껏 술을 따라낸  K는 기술도 좋게 소주잔을 들어 털어 넘겼다. 나는 술을 마시는 K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그것을 원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회의주의는 고장 나서 멈춘 시계 같은 거거든."

왜 그런 거지-라는 나의 물음이 나오기도 전에 그녀는 눈짓으로 조용히 닥치라는 신호를 보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따뜻하고 기분 좋은 종류의 욕설이었으니까. 나는 다시 계란말이로 눈을 돌리고 귀를 열었다. 계란말이에서 기름진 마가린의 축축한 향기가 났다. 

"가끔씩 정확히 맞추는 거야, 회의주의자들은. 멈춘 시계가 하루 두 번 정확한 시각을 맞추듯이. 그런데 이에 반해 회의주의자가 아닌 사람들, 통칭 신념주의자들은……."

신념주의자라는 기묘한 단어를 만든 K가 말 끝을 흐렸다.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단어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멈춤은 당황해서라기 보다도 그토록 적확한 단어가 만들어졌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감탄에 기인한 것이었을 테다. 그 사이 그녀는 소주를 한 잔 가득 털어 넣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신념주의자는 항상 틀리거든. 그들은 5분, 10분이 늦거나, 빠르거나 하는 사람들이거든. 절대로 맞는 법이 없지. 아주아주 근접할 수는 있어도."

나는 파전을 향해 손을 놀리면서 시계를 생각했다. 괘종시계든, 전자시계든, 회중시계든 똑딱똑딱 돌아가는 시계들이 눈 앞에 가득했다. 더러는 멈춰있다. 더러는 빨리 가기도, 느리게 가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봐 J-"

그녀가 갑자기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소-우주 같이 까맣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를 소우-주가 한 가득 채워놓았다. 나는 뒤로 주춤거리지만 의자 등받이가 나의 퇴로를 막았다.

"한 번 정답을 맞힌 사람은 절대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정답을 맞힌 사람은. 그러면 남은 질문은 하나야."

K는 점점 더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벽에 툭 튀어나온 못 하나를 그저 바라보았다.

"인생이 굳이 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아무것도 못 맞추는 머저리들과 가끔씩 맞추는 실패자들 사이에서?"

그건 너를 말하는 거야 이 머저리/실패자야. 그녀가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정도로 관념적인 것이었다. 틀림없이 그녀는 자신도 머저리이자 실패자로 생각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딱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술기운이 얼큰하게 올라와 있었고, 공기 중에는 술냄새가 무지개처럼 펼쳐져 있었다. 눅눅하고 다 불어버린 소면조차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차라리 시계를 부숴버리는 게 옳지 않을까?"

그녀는 다시 한번 소주잔 가득히 소주를 따랐다. 이번엔 소주를 마시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소주를 마시는 것을 보자 나도 퍽 마시고 싶어 졌다. 소주잔에 반절 가량 따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우리는 술집을 나와 비로 움푹 패인 거리를 갈지자로 걷는다. 네온사인이 반짝반짝거리는 도시의 뒷골목이다. 참방참방거리는 발자국 소리에 맞춰 사람들과 건물을 뛰어넘는다. 어느샌가 K는 현대의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나는 혼자 남는다. 나는 우두커니 손목을 바라보고, 거기에 째깍째깍 돌아가는 손목시계가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그것을 조용히 끌러서, 있는 힘껏 던진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시계는 곧 중력에 의해 땅으로 추락한다. 시계가 내는 둔탁한 비명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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