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아주 많은 일을 엄청나게 빨리 하는 사람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이 쉴 새 없이 그에게 들이쳤다. J는 침착하게 우선순위를 매기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비교하고, 계획을 세워 그에게 닥친 일을 처리했다. 시간이 남을때는 운동을 했다. 먹고, 잤다. 시간이 지날 수록 J는 점점 하루에 처리하는 일이 많아졌다. 주위 사람들은 J를 꽤 좋아했고-가족들을 포함해서 - J는 자신이 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끔 주위가 너무 평평해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거대한 모눈종이 위에 서 있는 것 같이.
J가 한창 사람들과 사무실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 따라 습관적으로 들이키는 커피가 좀 일찍 떨어졌고, 일어나려는 순간, 쿵! 하면서 J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중심을 잃은 팽이처럼. J는 차가운 바닥 아래에서 버둥거렸지만 팔다리는 납을 두른 것 같이 무겁고, 머리는 빙글빙글 돌았다. 눈 앞이 깜깜했다.
이런! 옴짝달싹 할 수 없다.
어찌된 영문일까? J는 힘겹게 일어나 사무실 벽면의 거울을 쳐다보았다.
아뿔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리는 사무실의 차가운 벽만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J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차곡차곡 책상에는 서류가 쌓이고, 메일 알람이 수시로 울리고, 전화벨이 요란하게 떠들 뿐 이었다.
그때, J는 사무치게 외로운 느낌과 함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공기가 추운게 아니라 몸 안의 더 깊숙한 곳에서 차가운 것이 전해오는 것 같았다. J는 텅 비어있는 거울을 한번 더 쳐다보고, 외투를 챙겨서 사무실을 나왔다. 그 누구도 J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J는 현명하기로 소문난 노의사 Q에게 가기로 했다. Q는 J에게 거대한 돋보기를 들이밀고 한참을 관찰했다.
"아이고."
Q가 풍선에 바람 빠지는 듯 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자가 영혼보다 한참 크군요."
J는 뒤를 돌아 자신의 그림자를 살펴보았다.
그림자는 J가 앉아 있는 의자를 넘어 벽을 타고 천장까지 뻗어 있었다. Q가 J에게 돋보기를 넘겨주고, J는 겨우 콩알만한 자신의 영혼을 발견할 수 있었다. Q가 J에게 말했다.
"원래 그림자는 영혼과 꼭 같은 크기죠."
"아니, 그렇다면 제 영혼을 모두 잃어 버린 건가요? "
Q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종종 영혼을 조금씩 잃어버린 답니다. 지치고 슬프기 때문이죠. 아니면 바쁘고 힘들던지 말입니다. 그렇게 영혼을 조금 덜어내고 나면 더 빨리 움직일 수 있거든요. 아마 높은 옥상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흘린 영혼으로 가득할 겁니다."
Q는 J의 거대한 그림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그림자가 영혼을 담아냅니다. 언젠가 영혼을 다 써버리지 않도록 말이에요. 그림자는 자신의 영혼을 발견할 때 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땅에 떨어진 영혼을 붙잡습니다. 그래서 그림자가 땅에 붙어있는 거지요. 흘려버린 영혼을 찾아내려고요."
"그렇다면 왜 제 영혼은 이렇게 작은거죠?"
Q가 안쓰럽다는 듯이 J를 쳐다보았다.
"그건 당신이 너무나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쉴새 없이 움직여서 그림자가 채 영혼을 움켜쥐기 전에 자리를 뜨는거죠. 그림자는 영혼을 찾기 위해 점점 더 커지지만, 당신은 항상 그보다 더 빨리 움직입니다. 영혼은 점점 작아지고, 그림자는 점점 더 커지지만 이제 당신은 한없이 가볍기만 하거든요. 그리고 영혼이 전부 다 닳게 되면 당신은 없어지고, 그림자만 남게 됩니다."
의사의 진단은 J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영혼을 채우기 위해서 당신이 줄 수 있는 약이 있나요?"
Q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행히도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약은 없습니다. 어떤 의술이나 수술도 영혼을 다시 만들지는 못하죠. 영혼을 모으기 위해서는 아주 느리게 걸어야 합니다. 그림자가 충분히 영혼을 끌어모을 수 있게 말입니다. 충분히 영혼을 끌어 모으면 다시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영혼을 모으는 데 시간이 꽤 걸릴지도 모릅니다. "
그래서 J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J는 느리게 걸었다.
길을,
집 안을,
출퇴근길을,
불 꺼진 사무실을,
낙엽이 진 집 앞 공원을,
겨울철 살 얼음이 낀 강변을,
눈이 얼어 미끄러운 오르막길을,
하얀 김만 나오는 가로수와 도로변을,
차가운 빛이 새어나오는 빌딩 숲의 거리를,
다리 난간 오들오들 떨며 모여있는 참새 아래를,
시린 태양이 이불처럼 덮인 아무도 밟지 않은 눈 길을,
눈 녹은 물에 발자국이 쌓여 이리저리 시커매진 보도블럭을,
따듯한 숨결에 담긴 맑은 바람에 기분좋게 흔들리는 가로수 옆을,
갓 피어난 꽃 들과 푸릇푸릇한 잡초들이 가득한 공원의 잔디밭 위를,
걷고 또 걸어서 결국 영혼을 찾아낸 사람과, 또 그에게만 보이는 높은 길을,
그리고 어딘지 모를 빌딩의 숲 속 작은 정원에 다다랐을 때, J는 비로소 자신이 잃어버린 영혼을 모두 모았음을 깨달았다. 굳이 거울을 볼 필요는 없었다. 이제 그림자의 크기가 꼭 J와 같아졌다. 정원은 녹기 시작한 눈과 미처 썩지 못한 낙엽이 한데 뒤섞여 J의 발을 질척였다.
서쪽 하늘엔 해가 낮게 걸려있었고, 나뭇가지 사이로 둥그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정원 뒤로 영혼을 잃고 허둥대는 사람들과 그 뒤를 바짝 쫓아가는 거대한 그림자들이 지나갔다. 정원의 끝에는 높이 오른 계단이 있었다. 아마 그 계단은 천국까지 닿을 것이다.
J의 영혼이 떠나라고 소리쳤다. J는 계단 밑에 그림자를 놔두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은 5월 바람의 속삭임 속에 있었다. 우리 모두가 아는 그 여인이 계단에서 하얀 빛을 밝히며 보여주려고 했다. 아직 모든 게 금빛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J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