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비밀로 가득 찬 왕국이 있었다.
어찌나 비밀이 많은지, 그 왕국의 국민들 조차 국왕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들 중 몇 명은 실제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왕정이 아니라 공화정으로 운영된다고 믿고 있었다. 왕국의 영토는 어디까지 인지, 몇 명이 살고 있는지, 아니면 국기는 어떻게 되는지 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왕국 안의 어떤 술집을 찾고 있다고 해보자. 당신은 곧바로 주소 책에서 술집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그와 거의 동시에 발신인 불명의 전보가 날아와 그 위치는 거짓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혼란스러워할 때 즈음 검은 코트로 몸을 감싼 건장한 사내가 당신에게 그 술집의 다른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네고, 그 쪽지는 당신이 확인 한 즉시 불타버린다. 매사가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비밀에 비밀, 비밀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래서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이 비밀스러운 왕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떠벌리기도 했다. 그냥 어처구니없는 비밀들이 만들어낸 허구의 왕국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단 한 개의 분명한 사실 덕분에, 사람들은 그 주장을 일축했다. 바로 담배였다. 왕국은 믿을 수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담배를 수입했다. 어떤 물품들이 수출입되는 지는 비밀이 붙여져 있지만, 담배만은 끊임없이 줄을 지어 수입되었다. 그래서인지, 왕국은 대낮에도 담배연기가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왕국은 마치 길을 잘못 든 구름이 눌러앉아 버린 것 같아 보였다. 바람이 불어도 담배연기는 생명이라도 가진 것처럼 비밀스러운 왕국을 의뭉스럽게 감쌌다. 그 자욱한 연기는 그 비밀스러운 왕국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자, 불쾌한 수단이었다.
이야기는 비밀스러운 왕국에서 조금 떨어진 별 볼일 없는 왕국에서 시작한다. 그 왕국의 수도 변두리 작은 하숙집에 '사과'라고 불리는 작가가 한 명 살고 있었다. 어째서 그가 '사과'라고 불리게 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 필명으로 써버린 '사과'라는 이름에 익숙해져 자신의 진짜 이름을 잊어버린 것이겠지만, 사과씨 본인은 그 일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이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왕국만큼이나 대단히 별 볼일 없었다. 작가로서 쓴 글이라고는 초고뿐인 소설 몇 개가 전부였다. 그는 간간이 들어오는 싸구려 신문의 기고란을 채우는 것으로 밥을 벌어먹었다. 그 기고란은 아무도 읽지 않아서, 사과씨 같은 3류 작가에게 종종 배당되었다. 쓰는 글도 하나 같이 진부하고 숨 막히는 문체로 쓰여 있어서, 차라리 읽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사람들은 항상 입고 다니는 낡아빠진 빨간 체크 셔츠로 멀리서도 사과 씨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날도 여느 때와 같았다. 사과씨는 아침부터 모래 맛이 나는 싸구려 커피를 댓 잔 마셨다. 그렇게 나온 몇 줄의 글을 신문사로 가져가기 위해 사과씨는 승합 마차에 올라탔다. 승합 마차는 텅 비어있었다. 사과씨는 마차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곤 별 볼일 없는 몇 가지 생각을 하다가 잠에 들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사과씨는 깜박 꿈을 꾸었다. 자신의 입에서 보라색 꽃잎이 계속해서 나왔다. 꽃잎은 계속 쌓여서 어느새 사과씨를 둘러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별안간 꿈속의 꽃잎에 불이 붙었다. 그 바람에 깜짝 놀라서 사과씨는 잠에서 깨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이 처음 와 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승합 마차의 창문 밖으로 자욱한 안개가 끼어있었다. 마차는 조금 더 가서 멈춰 섰다. 승합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렸을 때, 사과씨는 그 뿌연 안개가 담배연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뒤이어 칼칼한 기침이 터져나왔다. 조금 더 있으니 두통이 몰려왔다. 그리고 시간이 꽤 흘러서 기침이 좀 진정이 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그 비밀스러운 왕국에 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타고 온 승합 마차는 이미 뿌연 연기 사이로 사라진 뒤였다. 주위를 둘러봐도 처음 보는 사람들, 처음 보는 건물뿐이었다. 사과씨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돈이라고는 신문사에서 돌아올 때 쓸 마차 삯 몇 푼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쪽 주머니의 한 줌의 글 뭉치는 걸리적거리기만 했다. 사과씨가 들고 내쉬는 숨에 두통이 대답하듯 머리가 아팠다.
사과씨가 자신의 곤경에 대해 생각하려던 찰나에, 그는 등 뒤에서 갑작스러운 인기척을 느꼈다. 돌아보니 대단히 깔끔한 양복을 입고 있는 신사 둘이 서있었다. 그들은 얼굴에 가득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과씨는 그들이 내민 서류를 보았다.
'담배 수입 제한을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
사과씨는 머뭇거렸다. 그중에 키가 더 크고 높은 실크햇을 쓰고 있는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외부인이시군요. 상관없습니다. 지금 저희가 벌이는 이 캠페인은 모든 사람이 다 참가 가능하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담배 소비의 절감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으로 정부에 정식으로 담배 수입을 제한하자는 법률 제정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자, 여기 서명해주시죠."
좀 더 작고, 반짝 반짝이는 외눈 안경을 쓰고 있는 신사가 사과씨에게 펜을 내밀었다. 거절이라는 선택지가 전혀 없다는 제스처였다. 사과씨는 맥없이 서명했다. 두 신사는 사과씨에게 가벼운 악수를 한번 청한 뒤, 다른 사람에게 다시 그 서명을 이어갔다.
사과씨는 그 뿌연 담배연기 속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리 전체가 그런 운동들로 뒤덮여 있었다. 담배연기 속의 타르 때문에 시커 메진 가로수 사이에는 '라이터 가격 1000% 인상!' , ' 길거리에서 흡연시 실형 선고', '흡연자에게 죽음을!' 같은 자극적인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사과씨에게 접근했던 것 같은 신사, 노인, 아이들이 금연을 장려하는 캠페인을 벌이면서 돌아다녔다. 도로 곳곳에는 금연 표시가 적힌 시뻘건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한편에서는 무슨 금연 궐기 대회 같은 것이 열렸다. 저편에서는 한쪽 팔에 노란색 완장을 찬 사람들이 눈을 부라리면서 흡연자를 찾고 있었다. 모두 그런 식이었다. 도시 전체가 담배에 대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사과씨의 귀에 들리는 모든 대화는 담배, 담배, 담배에 관한 것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길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담배를 혐오했다. 부주의한 누군가가 실수로 담배에 불을 붙이기라도 한다면, 바로 사형이라도 당할만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거리를 가득 메운 담배연기는 그 사람들을 조롱하기라도 하는 듯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있었다. 어쩌면 그 무거운 담배연기에 사람들을 더 약 올리려는 사악한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사과씨는 생각했다.
사과씨는 어서 이 왕국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두통과 기침도 그렇지만, 담배에 대한 왕국 사람들의 태도가 그를 불편하게 했다. 사과씨에게 있는 그 눈곱만큼의 감수성이 그에게 무언의 경고를 하는 것 같았다. 사과씨는 곧장 마차가 섰던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마차 시간표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시간표는 시커멓고 끈적끈적한 것으로 뒤덮여 있었다. 사과씨는 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두세 걸음을 떼기 무섭게, 사람들이 그에게 무언가를 하기를 요구했다. 사과씨는 대여섯 가지의 서명란에 서명했다. 또 수상한 배지-잘린 손가락이 그려져 있었다- 를 받았다. 가슴에 손을 얹는 맹세도 몇 번 했다. 아니면 시위대의 중간에 끼어서 오도가도 못하기도 했다. 어렵사리 왕국에서 나가는 길을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런 것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사과씨의 말을 무시하거나, 대충 손가락으로 알려주며 담배에 대한 대화를 이어갔다.
얼마 되지 않아서, 사과씨는 녹초가 됐다. 그 안개 같은 담배연기 덕분에 해가 가려져 있어 시간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두통은 더 심해졌다. 목은 연기 때문에 칼칼해서 무슨 말을 해도 신음소리 같이 들렸다. 한껏 격양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를 왕왕 울려댔다. 주위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말들이 추상화처럼 점점 알아듣기 힘들어졌다. 마침내 서있을 수 조차 없게 된 사과씨는 가까이 보이는 어떤 집의 문설주에 기대어 앉았다. 끈적끈적한 역청이 그의 바지에 달라붙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사과씨는 자신의 두 무릎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꿈이라면 어서 끝나기를 빌었다.
그때, 어떤 굵은 목소리의 남자가 사과씨에게 말을 걸었다. 담배와 관련된 사람은 아니었다. 사과씨는 그것을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느꼈다.
"자네는 여기 사람이 아니군."
사과씨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담배연기로 흐릿한 시야에 남자의 형체만 어렴풋이 보였다. 큰 몸집을 트렌치코트로 감싸고, 사냥용 모자를 푹 눌러쓴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 사람들은 자네 같이 행동하지 않지. 이곳 사람들은 담배에 관한 짓거리라면 지칠 줄 모르니까."
그 목소리의 남자는 사과씨를 잡아 일으켰다. 사과씨는 마치 종잇장처럼 그의 손에 딸려 올라갔다. 남자는 사과씨를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두통과 기침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던 사과씨는 그의 부축을 받으며 자동인형처럼 걸었다. 거리의 연기는 그들의 자취를 덮어버렸고, 그들은 이내 뿌연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연기 속에서는 시간마저 숨이 막히는 듯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그 종잡을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 사과씨는 정신을 차렸다. 그때 그는 자신이 어떤 테이블에 앉아 있고, 그 테이블에 다른 사람들이 몇 명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군가 자신의 모든 신경들을 분리해 놓았다가 갑자기 이어 붙인 것 같았다. 사과씨의 눈 앞으로 여섯 명의 남자가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아, 이제 정신을 차리는 군. 뭐 좀 마시겠나? 커피? 차?"
사과씨를 끌고 왔던 남자가 물었다. 사과씨는 커피를 부탁했지만, 남자는 물을 가져왔다.
"사실 물 밖에 없네. 우리 사정이 넉넉한 편이 아니라서 말이야. 이해해 주게. 그건 그렇고, 소개부터 먼저 하지. 난 일요일이라고 하네."
흔한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과씨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러자 일요일이 말을 이었다.
"아, 이건 진짜 이름이 아니라 암호 같은 거네. 누가 듣고 있을 지 모르니까 말이네. 우리는 서로를 암호명으로 부르고 있지. 다 요일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있네."
일요일은 한 사람 한 사람 가리키면서 소개를 시켜주었다. 월요일은 호리호리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도금 안경을 쓴 훤칠한 청년이었다. 페인트 불같은 수염을 기르고 있는 화요일은 소개받는 내내 툴툴거리고 있었다. 그는 망할 연기 때문에 자신의 천식이 도졌다며 성내었다. 수요일은 얼굴을 반쪽으로 가르는 큰 흉터가 있는 군인이었다. 그는 일요일의 소개에도 딱딱한 목례로 말을 아꼈다. 금요일은 학자 같은 느낌의 사내였지만, 실제로는 도박꾼이라고, 일요일이 유쾌하게 말했다. 금요일이 투덜댔다.
"도박에는 심오한 진리가 있단 말일세."
토요일은 작고 유약해 보이는 남자였다. 덩치가 큰 일요일 옆에 앉아 있으니, 어린아이 같았다. 사과씨도 자기소개를 했다. 그가 자신을 작가라고 말하자, 테이블의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화요일이 말했다.
"하, 이 조촐한 모임에도 서기가 생기겠군."
사과씨는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좀 상했다. 하지만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고, 그렇다면 목요일은 어디 있는 지 물었다. 일요일이 그거 잘 물었다는 듯이 테이블을 쾅 치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잘 물었네. 목요일은 훌륭한 사람이지. 제법 능력 있는 탐정이란 말일세. 그가 온 이후로 우리의 일이 잘 돌아갔어."
흥분한 일요일을 테이블의 사람들이 말렸다. 일요일이 멋쩍은 듯이 입을 닫자, 월요일이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저희는 이 왕국의 가장 큰 비밀을 캐기 위해 이렇게 모였습니다. 각자 이유는 다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다들 이 일에 어떤 숙명적인 느낌을 갖고 임하고 있습니다."
월요일이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몸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실 그동안 별 진전이 없었지만, 최근 목요일이 들어오면서 많은 진전이 생겼습니다. 그는 그 천부적인 탐정의 재능으로, 이곳의 사람들이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에 어떤 장소에 모여서 무슨 의식을 치른 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우리가 재떨이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말이죠."
"그래도 그건 정말 수상했지." 금요일이 끼어들었다. 월요일이 말을 이었다.
"사실 엄청 이상한 일 투성이 입니다. 엄청난 양의 담배가 소비되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그 누구도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수요일이 몇몇 집에 무단으로 들어가서 샅샅이 뒤졌지만 담배는커녕 성냥개비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담뱃재도 볼 수 없고, 재떨이는 깨끗합니다. 그 누구도 담배가게에서 담배를 사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담배가게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월요일이 잠시 말을 멈추고, 더 작은 목소리로, 누군가 들을 것 같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이 담배연기는 실재합니다. 어디서 이 담배연기가 왔을까요? 모두를 감싸버리는 이 끔찍한 담배연기는? 어떤 대담한 사람들이 이곳 사람들의 엄청난 증오 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걸까요?"
토요일이 월요일의 말을 받아 말했다. 언듯 들으면 여자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고운 목소리였다.
"그동안 우리는 다방면으로 진실을 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만, 뚜렷한 성과를 낼 수 없었어요. 목요일이 오기 전까지는요. 목요일은 오랜 잠복 수사로 간신히 그들이 언제 모이는지 알아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너무 깊숙이 개입해버려서,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죠. 하지만 우리는 그가 보낸 비밀 전보를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수요일은 입고 있던 외투의 안쪽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내서, 테이블 한가운데 올려두었다. 종이에는 점과 직선이 그려져 있었다. 암호에 전혀 식견이 없는 사과씨는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토요일이 말했다.
"이건 우리가 사전에 미리 정한 암호입니다. 목요일은 자신이 못 빠져나오는 것을 대비해서 이런 암호를 미리 정해두었죠. 이 쪽지에는 장소와 시간이 적혀있습니다."
적막이 흘렀다. 공기마저 긴장한 것 같았다. 그때 일요일이 작게 속삭였다.
"바로 오늘 자정이네."
일요일이 말하자, 긴장이 한층 고조되었다. 월요일은 불안한 듯 발을 떨었고, 화요일은 잔뜩 성 이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요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일요일이 말을 이었다.
"오늘 자정, 비밀이 밝혀질 것이네. 이곳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가장 커다랗고 치명적인 비밀 말일세. 그리고 자네는, "
일요일이 벌떡 일어서서 사과씨를 가리켰다.
"우리의 증인이 되어주게. 이 비밀을 글로 옮겨서 세상에 퍼트려 달란 말이네. 어쩌면, 자네가 우리와 만난 게 필연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일요일이 말을 마치자, 금요일이 방구석에서 무언가를 뒤적였다. 금요일이 사과씨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수수한 무늬가 들어간 가면과 권총 한 자루였다.
"오늘 이곳 시청에서 열리는 가면무도회에서 그 비밀 집회가 열릴 것 같네. 금연 뭐시기 하며 파티를 여는 것이지만, 뭐가 벌어지는 지는 잘 모르지. 우리는 오늘 그곳에 잠입할 것이네. 같은 가면을 쓰고 있을 테니, 그것으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지."
사과씨는 자신의 앞에 놓인 가면과 권총을 집어 들었다.
"그 권총은, "
일요일이 결연하게 말했다.
"만일을 위해 수요일이 직접 개조한 권총이네. 쓸 일이 없기를 빌 수밖에. 자,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아 있으니, 다들 좀 쉬지."
일요일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 굳은 표정으로 휴식을 취하러 갔다. 월요일은 책을 꺼냈고, 화요일은 소파에 누웠다. 수요일은 자신의 품에서 사과씨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권총을 분해하고, 닦았다. 금요일과 토요일은 카드놀이를 했다. 일요일은 방구석의 소파에 앉아 잠든 것 같이 생각에 잠겼다.
사과씨는 머리만 한 작은 창문을 내다보았다. 그의 눈 앞으로 연기에 잠긴 왕국의 전경이 펼쳐졌다. 새삼 그는 자신들이 높은 빌딩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맑은 바람이 그의 폐를 채웠다. 사과씨는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곧 그의 품에 느껴지는 가면과 권총의 이물감에 기분이 어두워졌다. 사과씨는 혼란스러웠다. 한 평생 이런 모험과는 거리가 먼 사과씨였다. 인생에서 가장 큰 모험이라 봐야 바질을 키울까, 토마토를 키울까 하던 고민하던 것이 전부였다. 그가 살아왔던 모든 인생이 그에게 경고했다. 분명히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과씨는 그 비밀이 점점 궁금해졌다. 어쩌면 내게 필요한 건 그런 종류의 모험일 지도 몰라-사과씨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 일로 인해서 자신의 작가 인생이 꽃 피울지도 모른다고 되뇌었다. 사과씨는 좀 더 쉬기 위해 창문 옆의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번개처럼 잠이 들었다.
사과씨가 눈을 떴을 때,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12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자신을 기다려 주지 않은 사람들이 조금 야속했다. 사과씨는 얼른 가면과 권총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거리로 향했다. 12시가 넘은 깊은 밤이었지만 연기는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달은 연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꺼운 연기 속에서 가로등이 유령 불처럼 흔들렸다. 그 불빛에 의지해서 사과씨는 시청을 향해 갔다. 시청에 한 번도 가본 적인 없었지만, 유일하게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를 향해 걸어갔다. 거리는 낮의 소란에 답하기로 하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사과씨는 조금 헤맸지만 소리를 따라서 시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청의 크고 굵은 기둥들이 사과씨를 맞았다. 사과씨는 품 속의 가면을 꺼내 쓰고, 시청의 문을 열었다. 별달리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청 안의 홀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북적였다는 표현보다는, 홀에 도시의 모든 사람이 모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사과씨는 그 많은 가면 사이로 자신과 같은 가면을 쓴 사람들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다른 사람들이면 몰라도 덩치가 큰 일요일이라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짚단에서 바늘 찾기였다. 사과씨는 하하호호 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끼어버린 채로, 망연자실하게 서있었다. 자신을 버리고 간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홀의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반짝이고, 그 아래로 '금연법 제정 축하'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길게 늘여뜨려져 있었다. 홀 중간에는 분수가 물을 뿜고 있었다. 아기천사 조형물의 입에서 굵은 물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웨이터들은 묘기를 부리는 듯 한손에 쟁반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활보했다. 모두 사과씨와는 상관없는 듯 보였다. 아마 일요일과 사람들도 나와는 상관없을 거라고, 사과씨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미 일요일과 사람들은 그 비밀을 찾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이미 엄청난 비밀을 발견하고 흥분한 채로, 아니면 별거 아닌 비밀에 실망하고 아지트로 돌아가버렸을 수도 있다. 사과씨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선택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어느 것도 고르지 못했다. 별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과씨는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빽빽한 홀을 돌아다니는 웨이터가 날라다 주는 샴페인을 연거푸 마시기 시작했다. 사과씨는 한 잔 두 잔 마실 수록 웃음이 나왔다. 오르는 취기와 함께, 사과씨의 웃음소리는 계속 커져서, 이내 홀 안의 여느 누구와 같이 웃었다. 이 멍청한 비밀도, 그 멍청한 비밀을 찾는 멍청한 집단도 모두 우스워 보였다. 하지만 가장 웃긴 건 그것에 동참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그는 계속 마시고, 웃었다. 결국 사과씨는 거나하게 취해버렸다. 횡설수설 말을 지껄이고, 이리저리 비틀비틀 걸어 다녔다. 눈 앞이 핑 돌고 다리에 힘이 빠져서 걸을 수 없게 돼서야 홀의 계단에 무너지 듯 주저앉아서 잠들었다.
술기운이 가시자 잠이 깨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 지 알 수 없었다. 쓰고 있던 가면은 언제 벗었는지 온 데 간데없었다. 다행히 권총은 안쪽 주머니에 잘 있는 것을 확인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 북적거렸던 것이 꿈이었던 것 마냥 사람 한 명 찾아볼 수 없었다. 마시던 샴페인 잔이나 플래카드 등이 그대로 있는 걸로 보아서 홀에 있던 사람들이 어디론가 급하게 떠나버린 것 같았다. 사과씨는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홀에서는 괴이할 정도의 적막함이 흘렀다.
사과씨는 분수가 있던 자리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처음 홀을 돌아다닐 때에는 분명히 없었던 계단이다. 계단은 끝이 없었다. 철제 계단 두세 개가 간신히 보이고, 그 안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사과씨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그 끝엔 무서운 악마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사과씨는 생각했다. 너무나 무서웠음에도 불구하고, 사과씨는 자신도 모르게 그 지하계단으로 움직였다. 온몸의 세포가 다 반대쪽으로 가라 외치지만, 어떤 안 보이는 사슬에 묶인 것처럼 숙명적인 발걸음이었다. 마침내 철제 계단으로 발을 딛었다. 발이 철과 부딪혀서 공허한 울림을 내었다. 발소리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사과씨는 지하 계단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과씨는 계속 내려갔다. 계단은 끝이 없이 길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벽에 손을 짚고 더듬거리며 내려 갈 수밖에 없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벽돌은 축축했다. 바위들이 차가운 땀이라도 흘린 것 같았다. 그리고 생담배 냄새가 났다. 담배 냄새? 사과씨는 의아했다. 이 계단의 끝에 담배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터라 머리가 띵 하게 아팠다. 가끔씩 호주머니에 있는 권총을 만지작 거렸다. 그렇게 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내려가면 갈수록 생 담배냄새가 더욱 진해졌다. 더 이상 담배냄새가 진해질 수 없다고 느낄 때즘, 사과씨는 바닥에 도착했다. 거의 넘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조금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 지하실의 중간에 창백하고 희미한 불빛을 내뿜는 전등 하나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 작은 불빛은 지하실 어둠을 밝히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사과씨는 일단 지하실의 계단 뒤에 소리 죽여 숨었다.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방에는 분명히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이 어둠에 거의 익숙해졌다. 지하실은 생각보다 컸다. 거의 위의 홀 만한 크기였다. 그리고 그 전등 아래로 사람들이 있었다. 전혀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숨소리조차도. 아니, 그 누구도 숨을 쉬지 않았다. 사람들은 인형처럼 가만히 서있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은 산처럼 높이 쌓여있었다. 아마 담배일 거라고 사과씨는 생각했다. 저기 산처럼 쌓여있는 담배가 있다. 창백한 불빛 아래로 거대한 담배 더미가, 사람들은 그 주변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불길한 묵시록적인 소설의 한 장면 같다고 사과씨는 생각했다. 사과씨는 그 불길한 광경에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권총을 조심스럽게 손에 쥐었다. 체온에 따듯해진 권총이 조그마한 위안을 주었다. 사과씨는 숨죽여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다렸다.
갑자기 사람들이 움직였다. 무엇이 신호였는 지는 알 수 없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을 때, 사과씨는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사람들은 담배를 향해 움직였다. 먼저 도착한 사람은 담배 더미를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담배 더미가 무너지면서 사각사각거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담배를 먹기 시작했다. 우적우적, 풀 씹는 소리가 지하실을 메웠다. 그때 높은 담배 산의 불빛 아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사과씨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입을 벌리고, 손으로 자신의 발아래 있는 담배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그 사람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랬다. 어떤 사람은 담배 더미에 아예 얼굴을 처박고 있기도 했다. 양 손 가득 담배를 쥔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더 많이 담배를 먹으려고 했다. 아니, 먹는다기 보다는 그냥 몸속에 쑤셔 넣는 것처럼 보였다. 입은 그 많은 담배를 담지 못해 빠져버렸다. 입은 어느새 쟁반보다 크게 벌려져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목구멍 속으로 담배를 밀어 넣었다. 목이 터질 듯이 부풀고, 그보다 더 크게 배가 부풀었다. 배가 일찍 터져버린 사람들은 그 터진 구멍 사이로 담배를 밀어 넣었다. 모두가 담배를, 담배를, 담배를 먹고 있었다.
사과씨는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온몸에 전기라도 오른 것처럼, 덜덜 떨려왔다.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꼼작 없이 전등 아래의 야만을 볼 수밖에 없었지만,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 정신적인 마비에서, 사과씨는 이 광경이 꿈이기를 간절히 빌었다. 이보다 더한 공포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더한 공포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 많던 담배 더미를 다 먹었다. 사람이 많기도 많았지만, 그 엄청난 담배의 산이 사라질 정도였다. 충분히 먹지 못한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먹으려고 돌바닥을 긁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분히 먹은 듯 조용히 있었다. 사람들의 몰골은 흉측했다. 배의 이곳저곳이 터져서 담배가 삐죽 튀어나와 있고, 턱은 닫히지 않아서 덜렁거렸다. 다리나 팔 이곳저곳에 상처가 나 있었고, 그 안은 담배로 채워져 있었다. 사각사각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는데, 터진 상처로 담뱃잎이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걸 다시 주워먹었다. 그리고 누군가 불을 댕겼다. 어디선가 성냥 긋는 소리가 나더니, 전등 아래 어디선가에서 작은 불이 솟구쳤다. 사람들은 마치 나방이라도 된 것처럼 그 불빛을 향해 달려갔다. 밀치고 밀쳐지고 밟고 밟히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불은 점점 퍼졌다. 지하실은 불길에 휩싸였다. 그들은 즐거워 보였다. 그들은 새카맣게 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춤을 추었고, 웃고 있었다. 불길 속에서 잔인하고 즐거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지독한 연기가 넓은 지하실을 가득 메웠다. 연기마저 웃고 있었다. 연기는 강물처럼 천장을 흘렀다. 사람들은 빨갛게 타고 있으면서, 이곳저곳으로 뛰어다녔다. 그 불씨를 받아 다른 사람들의 몸에 불이 붙고, 웃고, 새카매졌다. 새카매진 시체들은 움직이면서 빨간 불씨를 떨어뜨렸다. 사람들이 담배였고, 담배가 그 사람들 자체였다.
사과씨는 절망적으로 총을 쏘았다. 도대체 무엇을 맞추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과씨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몇 발 안 되는 총알 중 몇 개는 사람들을 맞췄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닥에 쓰러져서도 버둥버둥거리며 발작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타고 있었고, 연기를 내뿜고, 재를 떨어트렸다. 사과씨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게 타 버린 사람들을 보면서 정신을 잃었다.
사과씨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발작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승합 마차 안이었다. 불에 탄 검댕 같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등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주위에는 그 악몽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사과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 일요일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그 비밀스러운 왕국의 비밀에 대해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사과씨의 책상 위에 담배가 한 갑 올려져 있었다. 사과씨는 담배를 빼어 물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채 담배를 먹었다.
그림- 빈센트 반 고흐, 담배를 물고 있는 해골 1886년,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