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 시간

by 엔데

우리는 어떤 방 안에 있다.

현재 우리의 시야는 육면체 방의 한쪽 모서리에서 방을 관찰하고 있다. 기분 나쁜 시커먼 칠이 된 문을 제외한 방의 모든 벽면은 온통 칙칙한 회백색의 시멘트로 빈틈없이 발라져 있다. 문 너머로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 시야의 가운데에는 그리 밝다고 할 수 없는 백열전등이 전선 하나로 위태롭게 걸려있다. 불쾌한 노란빛을 내는 이 전등 바로 아래에는 스테인리스로 만든 의자 두 개와 책상이 놓여있다. 의자는 정사각형의 책상을 마주하여 배치되어 있다. 그것들에선 쿠션이나 곡선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정말로 '앉기 위해'와 '무언가를 올려놓기 위해'라는 목적에만 충실하게 설계된 가구들이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방안에 보이는 것은 없다. 정적이 흐른다. 누군가가 소리란 개념을 통째로 삭제해버린 것 같다.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면서 철문이 열린다. 열린 문으로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들어온다. 짧은 백발의 머리에 60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 패 있고, 눈은 피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축 처져 있다. 다크서클이 밤의 어둠처럼 그의 얼굴에 넘실거린다. 한쪽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고, 우리는 곧 그것이 받침대에 끼워진 서류뭉치라는 것을 알아낸다. 서류뭉치가 심해의 기분 나쁜 수중식물 마냥 소리 없이 흐느적거린다. 그는 거의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걸어가서 방의 한 가운데 있는 의자로 간다. 그는 곧 의자를 빼내어 앉는다. 이 과정 역시 이 공간이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아무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 사내에게 흥미를 가진다. 아니, 우리는 누가 되었더라도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곳은 그런 공간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노인이 앉은 의자의 맞은편 의자로 시선을 이동한다. 그리고 이 노인을 자세히 관찰한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가슴팍에 달린 이름표이다. '정신과 의사 J'라고 쓰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노인을 J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J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서류를 넘기면서 무언가를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서류에는 알 수 없는 난해한 표와 기호, 숫자들이 가득했다. 때때로 J는 그의 가운의 안쪽에서 펜을 꺼내 무언가를 끄적인다. 우리는 시선을 J의 얼굴로 돌리고, 그의 얼굴을 관찰한다. 우선 단단해 보이는 높은 콧날이 인상깊다. 그것은 위압적으로 서 있는 오벨리스크 같은 인상을 풍긴다. 또 입은 잠긴 문처럼 닫혀 있어서 과연 의사소통으로의 기능으로 사용되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이마에는 누군가 칼로 찢어 놓은 것 같은 날카로운 주름 패 있다. 눈은 아까도 말했듯이 잔뜩 쳐졌다. 눈동자는 한없이 검다. 마치 깊은 연못의 수렁을 보는 것 같다.

J를 관찰하다 보니, 갑자기 소리가 들린다. 아까도 들렸던 철문이 열리는 소리다. 우리는 시야를 재빨리 소리가 난 쪽으로 돌린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남자이다. 마치 '평범'이란 용액 속에서 갓 꺼내온 클론 같다. 그는 싸구려 검은색 양복에 감각 없는 파란색 넥타이를 매고 있다. 얼굴은 자세히 들여다봐도 어떠한 특징 한 가지도 잡아낼 수가 없다. 마치 지우개로 말끔히 지워버린 초상화의 얼굴 같다. 사진이라도 찍지 않으면, 도저히 기억해 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얼굴인 것이다. 키도 딱히 크거나 작지 않았고, 몸매도 특별히 마르거나 뚱뚱하지도 않았다. 정말 보통 사람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그는 우리의 시야에 띄었을 때부터 계속 손을 등 뒤로 가리고 있다. '열중쉬어' 자세라고 보기에는 너무 각이 잡혀 있지 않고, 편하게 뒷짐을 진 거라고 하기에는 좀 부자연스럽다. 어린아이가 부모님에게 보여줄 수 없는, 금지된 물건을 들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 같다. 남자는 J의 맞은편의 의자로 간다. 남자가 빼는 의자는 J의 의자와는 다르게 같은 금속성의 비명을 지른다. 비명은 밋밋한 벽에 반사되어 울린다. 그 반향에 남자는 기가 죽는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앉는다. 주눅이 든 버려진 강아지를 보는 듯하다. 전구가 불안한 듯이 깜박거린다. J는 자신의 시선을 한 번도 서류에서 떼지 않다가, 남자가 자리에 앉자 비로소 눈길을 준다. 왜 들어왔느냐는 듯한, 의아함의 눈길이다. 그리고 그의 시선 깊숙이 경멸과 귀찮음이 묻어 있다. 그것은 마치 존재하지 말아야 할 더러운 것을 보는 눈이다.

우리는 전개가 시작된 이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우리의 시선을 이동시킨다. 이제 우리의 시선은 한 개의 철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모습을 담는다. 아니다. 자세히 보니 마주 보고 있다기보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물론 그 한쪽은 J이다. J가 먼저 입을 연다.

"어째서 면담을 신청하신 겁니까."

분명한 의문문이지만, 말꼬리가 올라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그것이 의문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게다가 J의 딱딱하고 메마른 목소리 때문에 종말 이후의 컴퓨터가 말하는 듯하다.

"시키신 대로 약을 먹었지만, 병이 낫지를 않습니다."

J에 비하면 퍽 평범한 목소리다. 어찌나 작은지-아마 이 남자는 평생 목소리를 높여본 적 없을 것이다-파리가 날아다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분노를 읽었다. 요컨대 이 남자는 자신의 '평범함'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고 있다. J가 서류로 눈을 돌리고, 무성의하게 대답한다.


"약효는 그렇게 금방 나타나지 않습니다. 약 복용 이후 최소 1~2개월을 기다리셔야……."

"그런 게 아닙니다. 상태가 더 심해졌다고요."

J의 말을 끊고 남자가 말한다. J는 그것을 몹시 불쾌해 하는 것 같다. 남자의 그런 대담함이 의외라는 듯 눈썹이 잠깐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이어서 J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그 미간 주름 사이로 추락하면, 꽤 아플 것 같다. 남자는 용기를 내어 J를 한번 쳐다보지만, 그의 주름의 깊은 골에 겁을 먹고 다시 고개를 떨군다. J가 말한다.

“그래도 약을 꾸준히 드시면서 일단 기다려 보는 것이…….”

하지만 다시 한 번 J의 말이 끊긴다. 이번엔 남자가 한 어떤 행동 때문이었다. 남자는 J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양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하지만 거기엔 '손'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손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건 손이 잘렸다거나, 처음 태어날 때부터 손이 없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그 남자에게 손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어진 것이다. 흰색 셔츠의 소매가 바람 빠진 풍선 마냥 힘없이 책상 위에 나동그라진다. 물질이 개념과 함께 사라진 이 현상은 콘크리트 방안을 묘한 분위기로 채운다. 마치 갈가리 찢긴 그 개념이 분위기에 섞여 있는 것처럼.

"약을 먹은 이후로 이렇게 되고 있습니다." 남자가 불안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한다.

J는 표정 하나, 몸동작 하나 바뀌지 않은 상태로 눈동자만 굴려 남자의 팔을 쳐다본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서류로 눈을 돌린다. 마치 가벼운 대조표에 채워 넣을 기본적인 사항을 확인했다는 듯이.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J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한다.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박리성 시간 중추장애 증후군의 변형처럼 보이는군요. 제 생각에는 시간이 쪼개 없어지는 과정에서 신체의 개념 일부가 용해되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사라지다니요?”

하지만 J는 대답하지 않고 펜을 들어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인다. 남자는 아까 J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듯하다. 우리는 J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보기 위해 시야를 J의 바로 어깨 위에 위치시킨다. 시야의 건너편에는 무언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남자가 있다. 우리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약간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려 J가 쓴 것을 관찰한다.

'피실험자가 상황을 알아차림. 즉시 제거 요망.'

J는 그 문장의 아래에 줄을 두 개 그어 강조한다. 곧이어 J가 말한다.

"시간 중독증은 매우 희귀하고 치료하기 어려운 병 중 하나입니다. 게다가 돌연변이라니, 쉬운 일이 아니지요.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이대로 계속 놔두어야 하는 겁니까? 이러다가 다른 부위라도 계속 사라지면…….”


J는 귀찮다는 듯이 미간을 다시 찡그리고, 남자의 말을 단호하게 끊는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처방전을 써 드리겠습니다.”

J가 자신의 서류에 무엇인가를 쓴다. 아니, 쓰는 척하는 것인가?

“이번엔 좀 더 강한 시간 안정제와 꿈 유도제를 처방하겠습니다. 파란색 시간 안정제는 시간이 사라지는 것 같을 때마다 드시고, 꿈 유도제는 불안할 때마다 드십시오.”

J가 흔드는 펜이 멈춘다.

“그리고 결과를 기다리십시오.”


모든 것이 강제로 해결된 듯한 분위기로 J가 말을 마친다. 더 이상의 의견은 듣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 남자는 무언가 더 항변할 것이 있는 것 같았지만, J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우물쭈물한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흐른다. J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입을 꼭 다문 채로 종이에 시선을 맞추고 있다. 아니, 종이에 시선을 맞추기보다는 그 앞쪽의 공백에 시선을 맞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지, 관찰하는 우리로선 도저히 알아낼 길이 없다. J의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로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차갑게 닫혀 있는 문을 바라보고, 이상한 리듬으로 깜빡이는 전등을 쳐다본 다음, 자신의 없어진 두 손을, 정확히는 손이 있었던 그 자리를 뚫어지라 쳐다본다. 마치 그렇게 쳐다보면 다시 손의 개념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문득 J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스테인리스 책상에 손을 짚으며 일어난다. 자신의 손이 있었던 자리를 응시하느라 정신이 팔린 남자가 깜짝 놀란다. 서류를 잘 추스르며, J가 말한다.

“오늘 면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합시다. 여기서 좀 더 기다리시면, 간호사가 약을 가져다 드릴 겁니다. 그럼 이만.”

J는 남자를 한번 건성으로 휙 돌아보고, 문을 향해 걸어간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의 소리도 나지 않는다. J가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려는 찰나, 남자가 입을 연다.

"박사님,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남자의 말이 회색 벽에 반사되어 불안하게 진동한다. 전구의 빛도 미세하게 깜박인다.

"제 삶은, 그러니까 제 잘못된 시간에 용해돼서 사라진 삶들은 어디 있는 겁니까? 저의 인생은 어디로 가버린 거죠? 그리고 같이 용해되어버린 내 손은요?"

J가 문고리를 잡은 상태로 뒤를 돌아본다. 짧은 순간, J의 눈에서 섬뜩한 빛이 스쳐 지나간다. 너무나 짧은 순간이어서 자세히 보지 못한 사람은 그저 잘못 비친 전깃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빛은 어딘가 깊은 폭력성을 띄었다. J는 사내에게 대답한다.

"그 사항은 아직 연구 중입니다. "

J의 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 같이 불길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나가던 중, 다시 멈춰서 말한다.

"궁금해하실 점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저희가 다 제어하고 있습니다. 그냥 저희를 믿으십시오. 그것 뿐입니다. 처방해드린 약을 꾸준히 드시는 것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궁금함을 갖는 순간, 모든 것이 일그러진다는 말입니다."

마지막 말과 함께, J가 나간다. 문이 열릴 때의 끼익 하는 소리를 제외하면, 조그마한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J의 주위로 안 보이는 방음벽이 설치된 것일까. 그리고 남자는 혼자 남아 있다. 그는 방 안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잔뜩 위축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다시 상황 전체를 관망하기 위해 다시 육면체의 한쪽 구석으로 시선을 이동한다. 불안한 듯 꼼지락거리는 사내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놀라울 정도로 처음과 같다. 아니, 무언가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 테이블에 펜이 하나 놓여있다. J가 펜을 놓고 간 것이다. 남자도 그것을 이제야 발견한 듯이, 펜에 눈길을 준다. 남자는 펜을 잡기 위해 손을 뻗지만, 그가 손을 뻗었다고 생각한 곳에는 손 대신 빈 소매만 위태롭게 펄럭인다. 남자는 작게 한숨을 쉬고, 용을 써서 펜을 몸 가까이에 가져온다. 그리고 힘겹게 펜의 뚜껑을 열고, 펜의 뒷부분을 어금니에 단단히 고정한 후 무언가를 책상 위에 써 내려간다. 잘 써지지 않는 듯, 여러 번 글자를 겹쳐 쓴다. 남자는 부단히도 애를 쓰고, 이마에는 땀방울까지 맺힌다. 마침내 남자의 작업이 완료된다. 우리는 그것을 보기 위해 시야를 조금 확대한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 과녁 맞히기 게임

규칙 1. 첫발은 아무 대가 없이 쏠 수 있다.

규칙 2. 화살이 과녁에 맞으면, 한 번 더 쏠 수 있다.

규칙 3. 화살은 과녁에 반드시 맞는다.


남자는 자기가 쓴 글을 뚫어지라 쳐다본다. 그리곤 입에 물고 있던 펜을 퉤 하고 뱉는다. 펜은 구석으로 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아니,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무언가를 생각해 보려는 듯이 몸을 좌우로, 앞뒤로 흔든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전등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이때 남자의 몸에 변화가 생긴다. 우리는 이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 급히 남자를 클로즈업한다. 남자의 몸에 무언가 일어나려고 한다. 그 변화는 소리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니, 귀를 기울여보니 완전히 소리가 없지는 않다. 문 밖의 아득한 곳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개 짖는 소리라니? 그리고 그 소리를 신호로, 남자의 눈이 암전 된다. 눈이 닫힌다. 그리고 다른 기관들도 그렇게 꺼진다.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마치 배터리를 급하게 제거해버린 가전제품처럼.

개 짖는 소리가 조금 커진다. 전파 수신을 방해받는 TV처럼 남자의 몸은 흐려지기와 선명해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남자가 갑자기 사라진다. 누군가 TV의 전원을 꺼버린 것 같다. 애당초 남자는 어떤 종류의 가전기기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의심한다.

방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가 관찰을 시작한 맨 처음과 같은 상황이다. 회백색 시멘트 벽에 처음과 다른 점이 있다면 먼 곳에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뿐이다. 아니, 그것은 개의 울음소리 라기보다는 성난 군중의 웅얼거림 같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사내의 부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사내는 어디로 갔을까? 입자 하나하나가 낱낱이 분해되어서 공기 중에 떠돌고 있을까? 아니면 스타트랙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어딘가로 순간이동을 한 걸까? 이런저런 가능성을 살핀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진 않는다. 그래서 그냥 일단 사태를 관망하기로 한다. 우리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개 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저 개들은 무엇일까? 어째서 병원에 개가 돌아다니는 것일까? 점점 소리가 커진다. 소리만으로도 아주 화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으르렁거리고, 폭풍같이 사나운 짖음이다. 그렇다면 개들은 무엇에 화를 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누구에게? 여러 가지 의문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는 너무나 적다.

그렇게 우리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남자가 갑자기 나타난다. 아까 사라졌었던 모습 그대로 별안간 다시 존재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사라짐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그는 꺼진 상태다. 하지만 조금 기다리자 마치 전원이 차근차근 공급되는 것 같이 남자의 몸이 하나 둘 씩 켜진다. 마지막으로 눈이 켜지고, 조금 뒤에는 남자의 정신까지 켜진다.

우리는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남자가 다시 존재하는 것으로 일단 만족한다. 남자는 방금 사건 자체를 인식 못 하는 듯하다. 남자는 그가 사라지기 전과 같이 똑같이 전등을 바라보고, 그가 쓴 글을 쳐다본다.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남자는 문득 개 같은 짓는 소리가 나는 것을 알아차린다. 우리는 그의 표정을 통해서, 남자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아마 누군가 병원에 개를 데려왔다가 놓친 모양이군,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짐짓 가볍게 그 소리를 무시한다. 하지만 남자는 본능에 따라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고개를 털어 불길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남자는 점점 커지는 그 소리를 듣다가 문득 자신의 몸에 어떤 변화가 생겼음을 알아차린다. 그는 벌떡 일어난다. 몸을 거칠게 흔들어 재킷을 벗는다. 손이 없어서 그런지 그 과정은 무척이나 더디다. 답답한 과정이 끝나고, 마침내 그의 허름한 검은색 재킷이 허물처럼 벗겨진다. 우리도 그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 적당한 위치로 시선을 이동한다. 우리는 그의 바로 앞에서 그의 전신을 바라본다. 셔츠는 누렇게 때가 탔고, 여기저기 잔주름이 잡혀 있으며, 옆구리에는 다리미가 태운 자국이 남아있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남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우리는 좀 더 자세히 남자의 상체를 관찰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가슴께의 셔츠 부분이 무언가 이상함을, 정확히는 그 셔츠 안쪽의 그의 몸에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다. 셔츠가 이상하게 푹 꺼져 있다.

그곳에는 마땅히 심장이라고 불러야 할 부분이 사라져 있다. 마치 안 보이는 거대한 펀치로 사내의 심장께의 부분을 통째로 잘라낸 것 같다. 사내는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심장이 없어진 것이다. 손도 손이지만, 심장이라니. 하지만 사내는 곧 체념한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쉰다. 없어진 심장은 돌아오지 않음을 그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남자는 다시 의자에 앉는다. 벌떡 일어설 때와는 반대로, 털썩 주저앉는다.


그때, 문이 다시 열린다. J와는 다르게 덜컥하는, 꽤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분명 J는 아니다. 우리는 예감한다. 어떤 종류의 문소리는 그런 사실도 알려준다. 우리는 시선을 돌려 문 쪽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몹시 가녀리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가 서 있다. 우리가 여태까지 보아온 어떤 것보다 아름답다. 아니, 어쩌면 소녀가 아닐지도 모른다. 많은 세월을 살았지만, 영원히 늙지 않는 천사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이 소녀의 존재는 이 방안의 성질과는 매우 이질적이다. 그저 존재만으로도 거대한 아이러니를 보는 것 같다. 소녀는 맨발이었고, 맑은 피부에 희고 얇은 원피스를 입고 있다. 머리칼은 별빛처럼 흰색으로 빛난다. 소녀의 등장에, 전등이 잠시 어두워진다. 남자는 소녀의 등장에 잠시 충격을 받은 듯, 소녀를 멍하니 쳐다본다. 필시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의 심장이나 손과 관련된 일이 잠시 잊혔을 것이다.

"도망쳐야 해요."

남자가 멍하니 소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 소녀가 말한다. 소녀의 말은 도무지 공간을 통해 전달되는 것 같지 않고 머릿속으로 직접 울리는 것 같다. 남자는 그런 소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넋을 놓고 있다.

"도망쳐야 해요."

소녀가 다시 말한다. 아까보다 더욱 다급한 목소리로. 비로소 사내도 들었는지, 소녀에게 묻는다.

"도망치다니, 무엇으로부터 말입니까?"

좀 더 메마른듯한 목소리이다. 이번엔 J의 목소리와 닮았다. 아마 심장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오고 있어요. 아주 빠르게요. 서둘러야 해요."

"그들이라뇨? 누가 나를 잡으러 옵니까? “

소녀가 두려운 기색을 보인다. 소녀의 표정에 한줄기 근심이 드리운다. 새하얀 도화지에 찍힌 검은 점처럼 불길한 기색이다.

"지옥의 개들이요. 당신을 갈가리 찢어버리려고 해요."

남자는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하다. 개의 소리가 부쩍 가까워졌다. 여러 마리가 동시에 짖는 것이 들린다. 남자가 말한다.

“저는 여기서 간호사를 기다리기로 되어있습니다.”

“간호사는 오지 않아요.”

“처방을 받지 않으면 저는 없어져 버리고 말 겁니다. 저는 처방이 필요해요.”

“처방도 거짓말이에요.”

남자는 혼란스러운 듯,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문다. 개의 소리가 한층 커지자, 소녀의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에 공포가 드리운다.

“시간이 없어요. 어서 도망쳐야 해요.”

“하지만 저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저는…….”

“그 병도 거짓말이에요. 당신의 삶을 없애는 건 병이 아니라 그들이에요. 그들이 당신으로부터 삶을 조금씩 훔쳐가고 있어요.”

남자는 간호사를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소녀를 믿고 따라가야 할지 주저한다. 문득 남자는 지옥의 개들에게 갈가리 찢기는 선택지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남자가 묻는다.

“하지만 그들은, 아니 지옥의 개들은 왜 나를 갈가리 찢어버리려고 하는 겁니까?”

소녀가 더욱 다급하게 대답한다.

“당신의 삶이 그들에게 저항하고 있어요. 그들 전체를 상대로요. 당신은 너무나 잘 해주었어요. 이제 그들의 약은 당신에게 듣지 않아요. 그래서 이제 그들은 당신의 삶을 통째로 삼켜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도망쳐야 해요.”

소녀가 남자의 손을 잡는다. 순간, 그곳에는 사내의 손이 있었고, 소녀의 손과 맞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하다. 소녀의 손은 남자가 만져본 그 어떤 것보다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움에, 남자는 지옥의 개들에 대해, 혹은 자신의 잃어버린 삶에 대해 잠시 잊어버린다. 소녀는 단호하게 문을 열고, 남자를 끌고 문밖으로 나간다. 우리 역시 이 흥미로운 전개를 지켜보기 위해 시선을 이동시켜 소녀와 사내를 따라간다.

문 밖은 끝없이 긴 복도다.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아주 어둡다. 복도 천장의 저 불길한 주황빛을 내뿜는 전등이 아니었다면 캄캄한 우주 공간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을 줄 것이다. 오래 묵은 돌의 퀴퀴하고 습한 냄새가 복도를 채우고 있다. 소녀와 남자는 손을 꼭 잡고 뛴다. 남자는 뛰면서 소녀의 몸에서 제법 밝은 빛이 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천장의 불길한 빛의 전등보다 훨씬 안도감을 주는 빛이다. 남자는 소녀에게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리고 남자는 또한 개들의 소리가 아주 많이 가까워진 것을 알아차린다. 저기 어둠의 너머에서, 개들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것은 개가 짖는 소리가 아니라, 사람의 말 같이 들린다. 나락에 빠진 영혼들이 내뱉는, 저주와 탄식이다. 남자는 소름이 돋는다.

문득 남자가 소녀의 손을 놓친다. 손이 다시 사라진 것이다. 소녀는 분명 사내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기 때문에, 둘의 간격은 꾸준히 멀어진다. 소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그냥 뛴다. 남자는 뛰다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개들을 발견한다. 검디검은 개다. 너무나 새카매서, 복도의 어둠 속에서 조차 선명한 검은색이다. 충혈된 눈은 붉게 빛난다. 개는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남자를 향해 다가온다.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준비가 된 듯, 입 주위가 씰룩거리고 있다. 날카롭고 촘촘한 이빨이 보인다. 분노에 가득한 발톱은 복도의 바닥에 상처를 낸다. 그들의 터무니없는 증오 때문에, 남자의 피부가 따끔할 정도이다. 어쩌면 그건 개가 아닐지도 모른다. 남자에게 살의를 가진, 고도의 집적된 증오를 품은 다른 세계의 위험한 생물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뛰는 일에 더욱 집중하기로 한다. 하지만 좀처럼 소녀와는 가까워지지 않는다. 다행인 점은 개들과도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남자는, 남자에 대한 개들의 커지는 적의를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시야 저편에 빛나는 점이 보인다. 남자가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우리의 시야가 그것을 포착한 뒤 한참 후의 일이다. '아마도' 그것은 출구일 것이다. 남자는 그것을 보고, 조금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소녀는 남자보다 너무 앞서, 이제 절반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어 보인다. 남자는 소녀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숨이 막혀서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그때, 남자가 아주 큰 소리와 함께 넘어진다. 옷이 볼썽사납게 찢어지고, 머리에는 피가 난다. 여기저기 아픈 멍이 든다. 소녀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달리기를 멈추고 저 멀리서 남자를 돌아본다.

"시간이 없어요. 도망쳐야 해요."

소녀가 말한다. 소녀의 목소리가 벽을 타고 메아리를 만든다. 그 메아리는 100년은 더 늙어 들린다. 사내는 소녀의 말을 듣고 힘을 내서 일어나 보려 한다. 하지만 그는 다시 고꾸라진다. 사내가 희미한 전구에 의지해 자신의 다리 쪽을 바라봤을 때, 이미 그곳에는 발이 사라지고 없다. 그의 손과 심장이 사라진 것처럼, 발이 사라진 것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신발이 나뒹굴고 있었고, 다리섶은 넘어진 깃발 같이 쓰러져있다.


남자는 절망적인 눈길로 소녀를 바라본다. 소녀도 안타까운 눈으로 사내를 쳐다본다. 뒤에는 지옥의 개들이 울부짖으며 쫓아오고 있다. 소녀는 잠시 주저하더니, 다시 빛나는 점을 향해 뛰기 시작한다. 소녀가 빠르게 멀어진다. 남자는 뒤쪽의 개들을 힐끗 바라본다. 그들 역시 빠르게 가까워져 오고 있다. 남자는 소녀를 다시 바라본다. 소녀 역시 아주 작아져서 하나의 빛나는 점이 되어간다. 사내는 주저하다가 빛나는 출구를 향해 기어가기 시작한다. 손과 발이 없지만, 그는 온몸으로 투쟁한다. 이렇게 잡힐 수는 없다.

절대로 나는 그들의 먹이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기어가기에는 출구가 너무 멀었고, 소녀는 너무 빨랐다. 그리고 뒤에선 지옥의 개들이 사내를 갈가리 찢기 위해 쫓아오고 있다.

지옥의 개들이 쫓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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