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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Mar 27. 2016

맥도날드 시그니쳐 버거에 대한 이야기

햄버거란 모름지기 한 손으로 들고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주의라면, 그것이 포크와 나이프가 같이 제공되었을 때 불을 처음으로 발견한 원시인 같은 표정을 지을 것이다. 무릇 햄버거란 하나의 엄지와 네 개의 다른 손가락, 그리고 필요하다면 다른 손까지 이용해서 내용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단단히 구속한 다음, 맞지 않는 입에 억지로 쑤셔 넣게 만들어 놓은 음식물 아니던가. 그리고 그 아귀가 제대로 맞지 않을 때 피클이며 양상추며 종이포장 안에서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난리를 피우다가, 다 먹을 때 즈음 푸석푸석한 빵만 남게 된다. 혹은 그런 상태를 의식하여 빵을 조금 더 빨리 먹어야지 생각하면 결국엔 퍽퍽하고 고기고기한 패티만 남게 된다. 어째서 이러한 일이 벌어졌나 종이 포장 안을 들여다보면 열역학 법칙이 잘 반영되어 엔트로피가 한 껏 증가된 내용물들이 처참한 상태로 발견된다. 왠지 그것들을 손으로 집어 먹자니 자존심이 상하여, 내 치아 열의 모양이 그대로 남아있는 패티까지 구겨서 버리게 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발전의 동물이라고, 어렸을 때의 그 불쾌한 경험을 겪지 않기 위해 나름의 많은 발전을 거둔다. 신체의 발달- 손과 입이 커지는-에 힘입어 더욱 효과적으로 햄버거를 붙잡을 수 있고, 언어로는 절대로 설명이 불가능한 테크닉이 늘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 손으로 햄버거를 잡고 다른 손으로 감자튀김을 케첩에 찍으며 입은 빨대를 물 수 있었을 때, 비로소 이 자본주의 시대에 완벽하게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맥도날드를 비롯한 롯데리아, 버거킹, 그리고 다른 수많은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온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수제 햄버거가 등장했다. 어디선가 작고 어두컴컴한 골목에 좁디 좁은 수제 햄버거 집이 생긴 것을 봤는데, 이제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 사실 '수제'란 수식어가 붙는 것부터 불쾌하다. 맥도날드 햄버거는 손으로 만드는 게 아니던가. 행여 그런 수식어가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프랜차이즈 햄버거 집 카운터 뒤 주방에서 일하는 30만 아르바이트생을 모욕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버젓이 '수제'라는 말을 붙이고 나타났다. 그리고 이제 그 햄버거들은 포크와 나이프가 같이 제공된다.


포크와 나이프가 제공된다는 것은 그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서른 가지 정도의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손으로 먹는 것은 그렇지 않다. 가장 간단한 행위, 태곳적의 원시인들부터 아직 사회화되지 않은 아기들까지 사용하는 이 유서 깊은 동작은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우며, 쉽다. 음식물을 집어서 입으로 가져간다. 이 간단하고 아름다운 동작.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동작을 할 수 있고, 어떠한 변수가 끼어들더라도 훌륭하게 이 동작을 수행할 수 있다. 미끌미끌한 콩자반이 나와도, 손으로 먹는다면 아무런 걱정없이 집어먹을 수 있다. 하지만 포크와 나이프가 제공될 때는 그렇지 않다. 그야말로 무한대에 가까운 선택지가 눈 앞에 펼쳐진다. 포크를 오른손으로 쥘지, 아니면 다른 쪽에 들지, 혹은 둘 다 들지 같은 기본적인 사항부터 과연 어떻게 잘라야 효과적으로 햄버거를 잘라서 입에 가져갈 수 있게 할지 같은 고차원 적인 사항까지 말이다. 아니면 이쪽 방향으로 썰어야 할지, 나이프로 샐러드를 찔러봐도 되는지, 포크를 세게 눌러서 잘라도 되는지. 대게 먹는 것과는 상관없이 에티켓에 관련한 내용이고, 만약 보는 눈이 없다면 어떻게 해도 상관없는 내용들 말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햄버거는 자르기 좋은 모양이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그러하다. 기하학적으로 살펴보면, 햄버거의 무게중심은 다른 음식에 비해 굉장히 높다. 그리고 흔히 그런 높은 무게중심은 음식물이 전복되기 쉬운 정역학적 특징을 갖는다. 게다가 재료적으로, 햄버거는 그 면에 작용하는 전단력을 받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소스에 접착제가 첨가되어 있다면 모르지만 말이다. 따라서 일본의 칼 장인이 만든 사시미 정도의 나이프가 아니라면, 어느 순간에 반드시 햄버거는 분해되고 만다. 그리고 대게 그 순간은 처음 나이프를 대는 그 순간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햄버거를 처음부터 분해한 다음에 원하는 크기만큼 잘라서 다시 그러모으면 되지 않냐고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겐 생선을 뼈째 입에 넣고 우글우글거리다 뼈를 흉하게 뱉거나, 스테이크를 통째로 집어서 입에 가져간 다음 옛날 만화영화에 나오는 산적들처럼 물어뜯으라고 권하고 싶다. 아니면 개그 프로그램에서 하는 것처럼 생라면을 먹고, 뜨거운 물을 마시고 수프 가루를 먹던지 말이다. 애당초 그렇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원했다면, 우리는 차라리 빵을 곁들인 햄버그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주문해야 했다. 우리는 그런 음식을 원해서 주문을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햄버거를 시켰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햄버거를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요컨데 먹는 방법, 음식을 다루는 방법에도 그 요리의 정수 같은 것이 담겨 있다. 햄버거를 분해하는 행동은 햄버거의 '햄버거성'을 파괴하는 행위이고, 이미 한 번 파괴된 햄버거성은 회복될 수 없는 것이다. 깨진 크리스탈을 접착제로 붙인 것 처럼, 그것은 이미 다른 음식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어떻게 수제 햄버거를 자를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어떤 시도를 해봐도 암흑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깨닫게 될 것이다. 위대한 구글갓은 실을 사용하면 완벽하게 자를 수 있다고 조언한다. 낚시줄 내지 명주실을 양 손에 쥐고, 영화 속 암살자들이 하는 것 처럼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햄버거를 이쪽 저쪽으로 자르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친 햄버거는 피자처럼 8등분 된 멋진 모양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꿈 속의 사진임을 안다. 애당초 우리에게 그런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는다. 차갑고 매정한 금속제 식기가 우리에게 서슬퍼런 강요를 한다. 어서 햄버거를 자르라고, 그리고 절망에 빠지라고.


그렇게 수제 햄버거에 지친 영혼은 다시금 안락함과 편안함을 찾아 맥도날드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마치 오랫동안 살았던 어린 시절의 동네로 돌아오는 것 같이. 아무런 부담 없이 햄버거를 손에 쥘 수 있고, 나이프와 포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행복한 유토피아에 말이다. 그것은 타지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유학생이 그 어쩔 수 없는 향수에 빠져들어 고향으로 돌아와 김치를 한 조각 먹는것과 같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간 맥도날드는 수제 햄버거를 팔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시켜먹어 볼 수밖에 없었다. 앉은자리까지 햄버거를 배달해주는 그 야만스러운 문화에 한번 놀라고, 흰 냅킨에 단단히 싸여 있는 포크와 나이프의 잔인함에 한번 더 놀랐다. 나는 결코 얇지 않은 포장지에서 결국 이 게임의 끝은 난장판일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철저히 패배하여 쓴맛을 느끼게 될 것을 예감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나는 패배했다. 이제 맥도날드는 없고 맥도날드 시그니쳐만 남아있다. 이제 우리가 안식을 느낄 수 있는 고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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