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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군 Mar 29. 2017

언젠가의 기록

시청 앞 태극기 집회를 지나며

1. 간만에 친구를 만나서 약간의 출사 겸 이래저래 을지로와 종로 일대를 거닐었다. 재밌었던건 친구와 내가 관심을 가지는 피사체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사람, 혹은 보다 정돈된 풍경, 아니면 자연을 담아내고 싶어했다면 나는 일그러졌거나 비틀린 공간, 혹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과거의 풍경들에 더 관심이 갔다. 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공간에 대한 삶의 경험 자체가 다른 것이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었는데 재밌는 시간이었다.

2. “요즘은 좋은 공간에서 좋은 에너지를 받고 싶다”고 말하니 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진행 중인 유영국의 <절대와 자유> 전시를 추천받았다. 한동안 이불밖으로 나가지 못해 이래저래 미루다가 친구와 함께 갔다. 전시는 너무 좋았다. 나는 전시에서 4개의 시기로 나눈 유영국의 작품세계에서 두 번째 시기가 가장 좋았다. 강렬한 색감과 거친 질감, 그리고 그것들이 유영국이라는 작가의 손을 거쳐 펼쳐진 거대한 작품을 보고 있는데 어떤 작품은 멍하니 계속 들여다보기만 했다.  


3. 다 사용한 필름을 맡기고 전시를 보러가기 위해 시청을 갔는데 “애국시민”들의 시위가 한창이었다. 그들은 문재인과 민주노총, 온갖 빨갱이와 종북세력을 ‘저주’하고 있었다. 청년좌파나 노동당 등과 같은 ‘진성 빨갱이’가 아닌 민주당 세력을 빨갱이로 매도하는 저들을 보며 나는 조금 서운했다. 역시 유명해져야 하는건가.


4. 소위 “애국시민”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청 앞을 가득 메웠다. 그들에 대해 일종의 인정투쟁이라는 시선이 담긴 기사도 있었다. (http://www.hani.co.kr/a…/society/society_general/781571.html) 언젠가 친구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 하면서 과거에 머물러 있는 노인들을 어떻게 바라봐야하는지에 대해 나눈 적이 있었다. 우리는 전쟁의 공포나 나라 전체가 빈곤을 겪다가 밥 한 끼 걱정하지 않았던 시기를 통과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저들의 삶의 맥락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채 무조건 노인들은 죽어야한다느니 무시해버리는 것은 안된다고 정리가 됐었다. 노인세대에 대한 혐오가 쌓아가던 나에게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삶의 맥락을 고려하는 것이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사회를 거시적으로만 본다면 결국 모든 개인은 역사, 혹은 사회구조의 피해자일 것이다. 연쇄살인범이나 가정폭력범, 성폭력 가해자, 어버이 연합 등 한명 한명 삶에 집중해본다면 많은 경우 어떤 부분에선 ‘피해자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를 피해자라는 범주안에서만 바라본다면 그들에게 살해된, 폭력을 받은, 모욕된 또다른 개인은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어떤 개인에 대해 내가 취해야 될 태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이다. 심지어 “태극기 집회”에는 노인만 있지는 않았다. 중년부터 청년층까지 다양한 계층이 모여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수꼴 노인들이 하루아침에 다 죽어버린다면 아마 저들이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한국사회가 언제나 그랬듯 보기 싫은 대상을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방식은 더 이상 안된다. 그렇지만 이 사회의 고여버린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전혀 모르겠다. 태극기를 흔들며 “문재인은 이완용”을 목놓아 외치고 “빨갱이에게 가족이 학살당”한 기억을 말하며 울부짖은 이들을 보며 나는 조금 슬퍼졌다.

5. 시청광장에서 착잡한 마음을 가지고 광화문으로 넘어왔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에 모여 있었다. 그중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노란리본공작소 라는 공간을 빼곡이 메운 사람들이 리본을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수많은 텐트들이 농성중이었고 “블랙텐트”라는 이름의 큰 천막에선 공연을 하고 있었다. 꼭 현장이 아닌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싸울 수 있다. 하지만 분명 현장에 나와서 그 공기를 느끼고 사람들을 마주하고 목소리를 들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덧.
얼마 전에 분신자살한 박사모의 회원 장례식에 가족들이 어떠한 외부인사들의 조문도 받지 않겠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었다. 만약에 내가 사랑하는 할머니와 같은 가족이 태극기 집회를 나가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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