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냉소적’은 ‘쌀쌀한 태도로 업신여기며 비웃는, 또는 그런 것’이라고 한다.
최근에 영상을 보다 알고리즘에 의해 뜻하지 않게 어느 유명 아이돌 그룹 춤 커버 영상을 보게 됐다.
춤과는 별 인연이 없는지라 평소에는 그런 영상은 잘 보지 않았는데 우연히 본 영상에는 내 또래의 한 여자가 굉장히 밝은 얼굴로 춤을 추고 있었다.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안 하겠다….’
솔직히 말해 여자의 춤 실력은 평범했다.
형편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출 난 것도 아니었다.
세 자릿수에 겨우 도달한 조회수와 수십 개의 영상.
나는 그 사람이 정말 조그만 관심을 받기 위해 의미 없는 짓을 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속으로 세차게 그 사람의 열정을 비웃었다.
하지만 이내 아차, 싶었다.
무의식 속으로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는 순간은 그렇게 내 속에 길게 머물렀다.
어느 날 드웨인 존슨이 냉소적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는 냉소적인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지 그들은 비웃으며 그런 이들이 실패를 겪게 되면 ‘거봐 그럴 줄 알았어’라고, 자기가 선구안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이 노력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남의 노력을 비웃고 남의 실패를 기다리고 남의 성공에 배 아파한다고 했다.
결국 냉소적인 사람은 이미 누군가의 노력을 비웃었기 때문에 무언갈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했다. 스스로가 노력하는 모습을 비웃었기 때문에.
드웨인 존슨이 냉소적인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 냉소적인 모습이 주변으로 전염되어 남에게 피해를 끼치기 때문이라고.
나는 그 영상을 보며 꽤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인생의 굴곡을 겪은 후 겁쟁이가 되어 난 내가 모르는 사이에 꽤나 심각한 냉소주의자가 되어있었단 걸 그제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그저 오늘에 안주하는 사람.
나는 그 안전지대를 벗어나기 두려워하는 겁쟁이였기 때문에 그랬었다.
하지만 그쯤에서 멈추면 되는데 나는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의 노력을 비웃고는 했다.
드러내 놓고 하진 않았지만 영상 속 여자를 향해 던졌던 것처럼 속으로 ‘저런 걸 왜 해?’라는 식의 깎아내리는 말을 했다.
내가 부정적으로 던진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의 실패를 은근히 빌었던 것 같다.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이유였다. 내가 예측한 게 맞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내 예측을 거스르고 성공하는 이들에게는 ‘운이 좋았나 보네’라며 내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무서운 것은 드웨인 존슨의 영상을 보기 이전에는 이런 나의 파괴적인 습관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내가 꽤나 선구안을 가지고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꽤나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시도를 해본 적이 없어서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는 내가 우물 안 개구리인 줄은 깨닫지 못하고 말이다.
그렇게 내 언어습관을 돌아보기 시작하자, 내가 얼마나 부정적인 언어를 던지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안 될 거야’, ‘어려워’, ‘못하겠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중이었다.
그것이 나 스스로에게만 악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 더 나아가 내 주변이들에게까지 전해졌다.
무의식 중에 살고 있는 냉소적인 자신을 이제는 쉽게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익숙지 않더라도 그런 나 자신의 견해를 바꾸어 반대로 누군가의 노력에 박수를 치며 대단하다 치켜세워주길 원한다.
비록 처음에는 낯설더라도 말이다.
내 예측이 틀리더라도 누군가의 성공에 진심으로 축하하고, 누군가의 실패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매일을 버티며 살아가기에도 버거운 세상에 굳이 누군가에게 짐을 하나 더 얹지 말자.
따스한 격려의 말로 누군가의 짐을 덜어주지는 못할 망정.
내 냉소적인 면이 누군가에게 해를 가할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자.
그리고 최대 피해자는 그럼으로써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는 나라는 걸 기억하자.
냉소적인 것은 지혜에서 거리가 멀기에 때로는 지나치게 실을 따지지 말고 그냥 해보는 사람이 되자.
냉소적인 것은 이도 저도 못하는 겁쟁이의 다른 말임을.
스스로 똑똑한 척하면서 멍청하게 구는 지름길임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