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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끗 Sep 05. 2021

타인으로부터 완벽한 이해를 받을 수 없다

타인으로부터 완벽한 이해를 받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타인.

반대로 나도 그의 입장을 완벽히 이해할  없을 것이다.

내가 그의 상황에 놓여보기 전까지는.


내게도, 타인에게도 삶을 이루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삶의 한 면이 같다한들, 나머지 면들은 모두 다른 것 투성이기에 내가 처해보지 않은 타인의 상황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힘들다.

그저 그의 힘듦이 있고 내 몫의 힘듦이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다.


내가 타인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그런 순간, 나는 나 자신에게 ‘난 결코 저 사람에 관해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라고 의식적으로 속삭이고는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떤 실언을 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제삼자의 입장으로서 어떤 상황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기에 그렇다.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입장이 되어보기 전 그의 상황에 대해 첨언하는 것은 분명 내가 얼마나 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를 티 나게 만들겠지.


흐릿하게나마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그가 느낄 힘듦에 관해 추측해보고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지, 난 감히 타인을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타인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도 나의 힘듦을 아주 알 수 없겠지.

그도 어렴풋이나마 내 힘듦을 알고 있겠지.


그래서 그의 이해심 부족한 말에 상처 받을 필요가 없다.

내 상황이 그의 상황보다 낫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말에 상처 받지 않아도 된다.

그는 물에서 가라앉지 않기 위해 열심히 물 밑에서 몸부림치는 나를 보지 못한 것이고, 아마 나도 그의 몸부림을 제대로 볼 수 없을 터이니 섭섭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타인이 나를 이해하는 것이란 그리도 어려운 일이란 걸, 또 반대로 내가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란 그렇게 어렵다는 걸 다시 한번 새기면 된다.

그냥 그 정도로 하고 넘어가자.

그에겐 그의 몫의 어려움이 가장 크게 느껴질 테니 말이다.


정말로 당연한 일이기에 너무 놀랄 것도 없다.

타인은 말 그대로 타인일 뿐이고 나도 나일뿐이니.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힘듦을 폄하하거나, 쉽다 평가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면 될 뿐이다.


누구의 힘듦이 크냐며 도토리 키재기식으로 싸우기보다는 내가 먼저 그의 힘듦이 가장 큰 것이라 알아주는 사람이 되자.

그냥 그렇게 하고 이 섭섭함을 내일까지는 가져가지 말자.

나도 이리 불완전한 이해심을 갖고 사는 인간일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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