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으로부터 완벽한 이해를 받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타인.
반대로 나도 그의 입장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의 상황에 놓여보기 전까지는.
내게도, 타인에게도 삶을 이루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삶의 한 면이 같다한들, 나머지 면들은 모두 다른 것 투성이기에 내가 처해보지 않은 타인의 상황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힘들다.
그저 그의 힘듦이 있고 내 몫의 힘듦이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다.
내가 타인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그런 순간, 나는 나 자신에게 ‘난 결코 저 사람에 관해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라고 의식적으로 속삭이고는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떤 실언을 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제삼자의 입장으로서 어떤 상황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기에 그렇다.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입장이 되어보기 전 그의 상황에 대해 첨언하는 것은 분명 내가 얼마나 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를 티 나게 만들겠지.
흐릿하게나마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그가 느낄 힘듦에 관해 추측해보고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지, 난 감히 타인을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타인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도 나의 힘듦을 아주 알 수 없겠지.
그도 어렴풋이나마 내 힘듦을 알고 있겠지.
그래서 그의 이해심 부족한 말에 상처 받을 필요가 없다.
내 상황이 그의 상황보다 낫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말에 상처 받지 않아도 된다.
그는 물에서 가라앉지 않기 위해 열심히 물 밑에서 몸부림치는 나를 보지 못한 것이고, 아마 나도 그의 몸부림을 제대로 볼 수 없을 터이니 섭섭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타인이 나를 이해하는 것이란 그리도 어려운 일이란 걸, 또 반대로 내가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란 그렇게 어렵다는 걸 다시 한번 새기면 된다.
그냥 그 정도로 하고 넘어가자.
그에겐 그의 몫의 어려움이 가장 크게 느껴질 테니 말이다.
정말로 당연한 일이기에 너무 놀랄 것도 없다.
타인은 말 그대로 타인일 뿐이고 나도 나일뿐이니.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힘듦을 폄하하거나, 쉽다 평가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면 될 뿐이다.
누구의 힘듦이 크냐며 도토리 키재기식으로 싸우기보다는 내가 먼저 그의 힘듦이 가장 큰 것이라 알아주는 사람이 되자.
그냥 그렇게 하고 이 섭섭함을 내일까지는 가져가지 말자.
나도 이리 불완전한 이해심을 갖고 사는 인간일 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