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어려움을 이겨나가며 무언가 머리로 깨달았다고 해서, 그 후에 비슷한 일을 대하며 태연하기만 할 수는 없더라.
겨우 아문 상처에 소금을 붓듯이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이제야 무언가 깨닫고, 그 상처로부터 떠날 준비가 됐다고 자신감을 되찾을 때쯤 불쑥 찾아오는 비슷한 일이.
삶을 살다 보니 어떤 동화나 자기 계발서와 같이 무언가 ‘극복’ 해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더라.
벼랑 끝에서 밀쳐져 절벽을 오르는 필사적인 힘으로 상처를 잘 돌봐서 아물게 만들었더니, 그걸 그대로 도로 찢어버리는 것과 같은 경험이 기다리기도 하더라.
계속 아프고 서글프다.
기계처럼 문제 해결에 대한 답만 얻으면 그냥 그다음에 일어나는 비슷한 문제 따위 금방 해결하고서 나를 더 낫게 만들어 줄 또 다른 문제를 설레는 마음을 기다리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계속 아프고 서글픈가 보다.
겨우 아문 상처를 지나가던 누군가가 무심히 터뜨려 버리면 나는 그냥 피를 흘리며 아파하는 수밖에.
그렇게 끙끙 앓는 내 초라한 모습을 보면 이전의 아픔을 통해 얻었던 깨달음이 모두 헛것이었나, 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이 모두 거짓이라 믿기엔 그 고통은 너무 생생했었다.
또 그때를 지나고 밝게 웃었던 나도 너무 행복했었다.
인생이 내게 적당한 고통을 통한 무언가를 선물해 주려고 이런 일을 만나게 했겠거니,라고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을 견디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야속하기도 하다.
나는 언제까지 이 아픔을 견뎌내야만 하는가.
왜 나는 또 이유모를 어려움을 맞으며 홀로 서러워야만 하는가.
하지만 늘 그래 왔듯, 알 수 없는 인생사 가운데 지나가는 일이라고, 또 나는 나아질 거라고 되뇌는 수밖에 없다.
고통을 견디고 나면 더 나아지는 내가 있겠지, 라며 순수하고 어렸던 나는 기대감을 갖기도 했던 거 같은데 지금의 나는 그냥 많이 아프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모든 게 지나고 나면 결국 또 터질 수도 있는, 이전의 살보다 훨씬 약해진 흉터가 남을 걸 알기에.
하지만 이 못난 상처를 통해 비슷한 상처를 가진 주변인들을 더 주목하게 된다.
상처가 남기 이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모습들을 이해하고 전보다는 더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된다.
그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겪었을 일이 나와 비슷한 경우에는 그가 내가 되고, 내가 그가 된다.
그가 아파하는 모습에 나를 떠올리며 그를 위로하며 동시에 전에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나를 위로하기도 한다.
그와 함께 울며 내 안에 씻겨나가지 못한 상처의 흔적이 함께 씻겨나가는 것을 느낀다.
그래, 그래서 이렇게 계속 아픈 걸까.
비슷한 상처에 쿨하지 못하게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파하는 건, 어쩌면 이래서일까.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차오르는 서글픔을 삭여야만 하는 오늘이 있는 걸까.
아니면 나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그저 내 상처에 거창한 명분을 더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는 걸까.
아픔이 가득한 인생을 꾸역꾸역 살아내기 위해서라도.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을 나는 참 좋아한다.
내가 상처 입지 않았던 시절엔 이해하지 못했던 말이지만, 상처가 가득하고 이 악물고 마주해야 하는 고통이 가득한 지금은 내게 매우 희망적인 말이다.
상처를 입어봤기에 그 고통의 깊이를 단번에 이해하고, 단순히 이성이나 지식으로만 이해하는 게 아닌 마음과 감정으로 그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그렇기에 아파하는 이를 온전히 위할 수 있는 사람.
상처 투성이어서 볼품없는 내게 무언가 따뜻한 마음을 선물해주는 말이기에 오늘도 조용히 그리고 깊숙이 품는다.
인생, 계속 아프고 서글프다.
행복이 한 방울쯤 섞였다 싶으면 파도처럼 아픔이 몰려오는 듯하는데도 놓을 수 없는 걸 보면 내가 겪은 이 모든 아픔을 어떤 거창한 것으로 승화를 시켜내야만 한다는 내 고집 때문인 듯하다.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는지는 몰라도.
그냥 살다가 어쩌다 만난 행운처럼 그렇게 불쑥 알게되길 바랄 뿐이다.
또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한 방울의 행복에서 피어나는 진하고 좋은 기억들 때문인지도.
그래서 계속 똑같은 것에 아프고 서글퍼도 살아보려고 하는 건가 보다.
그렇게 모두들 아파도 살아내는 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