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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끗 Feb 13. 2022

부딪히기에 깎인다

타인이 모두 내 맘 같을 순 없다는 건 불변의 진리다.

각양각색,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서 나와 똑같은 사람 찾기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노력 없이도 조화를 잘 이루며 살 수 있는 편한 관계가 있는 반면, 참 자주 삐걱거리는 관계도 있다.


뾰족한 내 모서리와 그의 모서리가 만나 자꾸만 부딪히는 것 같은 경험, 모두 해봤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의 모서리가 나를 찌르는 느낌이 너무 아파서 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라면 관계의 지속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지만, 그럭저럭 견딜만하지만 불편한 상태일 때 흔히 나는 고민에 빠지고는 한다.


상대의 모서리가 뾰족한 건 사실이지만 그 불편함이 견딜만할 때나 아니면 아파도 그를 상쇄하는 그의 장점이 눈에 띌 때.

그때 나는 딜레마에 빠지고는 한다.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도 이 관계를 지속하는 게 맞나 아니면 이 불편함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기 위해 그냥 이 관계를 놔버리는 게 맞나.

지극히 이기적인 한 인간으로서 득과 실을 따져보지만, 어느 쪽을 택하든 그 무게는 같아 고민이 되고는 한다.


밀어버리자니 아쉽고, 또 안고 가자니 성가신 그런 관계.


그런데 삐걱거리는 관계가 있기에 내 모서리가 조금씩 갈려나가는 게 아닌가 싶다.

그와의 마찰을 겪는다는 것은, 어찌 됐건 그의 모서리와 나의 모서리가 마찰을 일으키며 조금씩 깎여나간다는 의미 같다.


내 모양에 딱 맞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관계도 분명 소중하지만, 적당한 불편함을 초래하는 관계도 그 나름대로 소중하다.

그와의 삐걱거림이 존재하기에 나는 조금씩이나마 나의 뾰족한 부분을 알아차리게 되고, 그를 통해 다음 만나는 이에게는 조금 뭉툭해진 모서리를 보일 수 있게 된다.


그를 대하며 ‘아차’ 싶은 부분이 여태 눈에 띄지 않았던 부분일 지라도, 분명 그 모서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지 한번 알아차리고 나면 내게도 이런 면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워낙 둥글둥글해서 나는 피해만 받으며 살아왔다는 그런 무지막지한 피해의식에서 날 한 번쯤 돌이켜 냉철한 자기 검열을 가능케도 한다.

과도한 자기 연민의 늪에서 나를 구출해내기도 한다.


삐걱거리고 불편하다고 해서 무조건 건강하지 않고 버려야만 하는 관계는 아닌 것 같다.

내 맘이 네 맘, 네 맘이 내 맘 같은 관계.

보석과 같아 분명 희귀하고 소중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몽땅 모아 쓰레기통에 처박아야만 하는 그런 무의미한 관계는 아니라는 말이다.


분명 부딪히기에 깎여나간다.

깎이기에 나는 성장통을 앓고 훌쩍 크기도 한다.

치료 과정 중이 아프다고 해서, 쓰다고 해서 무조건 몸에 나쁜 게 아니듯, 이 사소한 불편함도 그렇다.

내게 부딪혀 오는 사람이 있어 마음이 좀 불편하다면 한 번쯤 짚고 넘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

그가 부딪힘으로써 내가 깎여 더 뭉툭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과정일까?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한번 던져보길.


분명 불편하고 때로는 괴로울 것이다.


나를 과하게 희생하고 버려가면서까지 모두에게 맞춰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심고 싶은 게 아니다.

할 수 있을 만큼, 감당할 수 있는 선에 서라는 전제는 늘 깔려있어야만 한다.

그의 모서리가 나를 병들게 한다면 분명 그 관계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사소한 불편감이라면 한 번쯤 참아 넘겨보는 걸 추천한다는 의미다.

그 불편감을 통해 내가 성장할 수도 있으며, 또 나의 모서리를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부딪히기에 내가 깎이고 나의 유일무이한 모양이 새롭게 잡힌다.

모서리가 조금은 깎여나가 뭉툭해진 부분이 퍽 마음에 들어 적는다.

다음에 날 만나는 이는 조금 덜 아프길.

우리의 뭉툭해진 모서리가 서로를 조금 덜 아프게 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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