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생각 속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어쩌라고’.
얼핏 들으면 굉장히 무례한 말 같지만 그냥 스스로를 향해 던지는 말이기에 괜찮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머릿속을 시도 때도 없이 침범하는 잡생각들에게 던지는 말이다.
예민한 탓에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다.
사람의 순간적인 표정을 잘 읽어내고 그 뒤에 묻어진 생각을 감지할 정도로 꽤 예민한 탓에 나는 상대의 드러나는 표정에 따라 꽤나 전전긍긍하는 편이었다.
상대의 표정에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감정이 섞여 있으면 곧잘 나는 내 탓을 하고는 했었다.
‘내가 무례한 말을 했었나?’
‘나를 싫어하나?’
‘내가 뭘 잘못했지?’
글로 열거하면 참 말도 안 되고 무논리적인 생각이지만, 그 당시엔 난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사로잡히고는 했었다.
때로는 더 나아가 집까지 그 고민을 들고 와 종종 어리둥절해하는 상대에게 사과의 말을 던지기도 했었다.
이런 예민함이 관계에 가장 안 좋은 영향을 미쳤던 점은 바로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 동안 내가 위축되었던 탓에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었다.
나는 미움받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초조함을 느꼈었고, 그래서 더더욱 부자연스러운 실수를 하기도 했었다.
사실은 아무런 생각이 없던 상대로 인하여 날 이상하게 볼 이유를 제공한 셈이었다.
그래서 느지막이 나마 개발한 방법은 ‘어쩌라고’다.
그런 잡생각이 들면 생각이 흐름이 거침없이 흘러가버리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 나는 내 생각 위에 ‘어쩌라고’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럼 거짓말처럼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가는 걸 멈출 수 있더라.
생각이 뻗어나가지 않으면 난 그 생각에 매몰되지 않았고 그랬기에 더더욱 현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다 보면 그가 나타냈던 부정의 기운이 꼭 나 때문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극소수의 경우 나의 어떤 부분 때문에 그랬던 것 같던 이들도 있었는데 그럴 경우 나는 바로 그에게 내가 불편하게 한 것 같은 점에 대해 묻거나, 내가 특별히 그에게 실수하지 않은 것 같은 경우에는 다시 ‘어쩌라고’를 시전 했다.
내가 특별히 실수한 게 없다면 정말 별 수 없기 때문에.
‘어쩌라고’를 통해 어느 정도 마음의 자유를 얻고 나서는 또 한 가지 결심했던 것은 상대의 감정을 굳이 내가 떠안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상대의 감정을 굳이 내 마음속으로 끌어들여서 그를 대신해 그것을 해결해주려고 애쓰는 것도 어떻게 보면 기만이니 말이다.
그의 감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믿는 것도, 또 그걸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기만이다.
날 안 좋게 보려는 그에게 매달려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선을 넘는 거고.
그래서 상대의 감정이 읽힐 때 최선을 다해서 공감은 하되, 그의 감정을 내 것같이 여기며 내가 대신 끌어안고서 끙끙 앓는 미련한 짓은 멈추기로 했다.
‘그래서 어쩌라고’라며.
그러다 보니 밤새 나를 괴롭혀대던 생각들 중 대다수가 잘 정리됐고 덕분에 나는 현재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예전엔 수많은 생각들에 사로잡혀 우울해하고 낙담하며 현재의 일을 놓치고는 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현재를 꽉 사로잡을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생각을 멈추는 법을 깨달으니 몸을 더 움직이고 지금 나와 함께하는 이들에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하루 동안 머릿속 타인에 대한 생각 때문에 우울에 매몰되는 시간보다 몸을 움직이며 어떻게 하면 지금을 더 찬란하게 살아낼까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서 좋다.
그래서 매 순간 나와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더 최선을 다할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실재에 집중하니, 오히려 타인들과의 관계가 좋아지고는 한다.
그들의 페이스에 휘말리기보다는 내 페이스를 유지할 줄 알게 되어서 좋다.
‘어쩌라고’라는 말이 지나치게 공격적이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가위의 날이 날카로워야 어느 것이든 더 잘 자를 수 있듯, 조금 날카로운 말이어야 내 생각을 끊어내는 데 더 유용하게 느껴진다.
이 끊어내는 맛을 같은 프로 예민러들에게 널리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 마음고생 그만하기 위해 ‘어쩌라고’를 시작해 봐요,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