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재기

by 끝의 시작

옷장 깊숙한 곳에서, 어릴 적 아끼던 옷을 꺼내 든다.
소매에 팔을 넣어보니, 훌쩍 짧아진 길이에 손목이 드러나
멋쩍은 웃음이 새어 나온다.


꼭 맞던 품은 이제 몸을 죄고,
바지 길이는 껑충하게 발목 위에 멈춰 선다.

시간은 이렇듯 소리 없이 몸 위에 자국을 새긴다.


짧아진 옷소매는 지나간 날들의 증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아련한 기념품이다.
아쉬움이라기보다, 손끝으로 만져지는
세월의 당연한 흐름


아이들은 자고 나면 키가 자란다던가.
어릴 적 나 또한 그러했으니,
몸이 위를 향해 자라나는 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벽지에 그어두었던 키 눈금은 꾸준히 위로 향했고,
그것이 주는 은근한 기쁨이 있었다.


어느덧 나는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눈금이 한 자리에 머무름을 알게된 순간,

내게 하나의 과정이 마무리되었음을 알리는

담담한 마침표가 찍혔다.


위를 향한 성장이 멈춘다는 것.
그것은 물리적인 자람의 끝이자,
다른 성장을 향해 나아갈 시간임을 조용히 일러주었다.


몸의 성장이 멎은 그 자리에,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키가 자라기 시작한다.
생각의 깊이, 관계의 너비, 세상을 이해하는 시선 같은 것들.

벽에 눈금을 새기거나 옷 길이를 잴 수는 없어도,
분명 나는 어제와 다른 오늘을 디디고 있다.


작아진 옷가지를 다시 옷장 깊숙이 넣으며 생각한다.
키는 멈추었지만, 나는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자라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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