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정류장

by Hache

가치를 만들기 위해 종으로 성장해야 하는 시기가 필요하다면, 그 가치를 사용해 횡으로 세계를 넓혀나갈 시기도 필요하다. 파고들기만 해서는 세상을 볼 수 없다.


유독 긴 출근길이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렸고, 도로를 씽씽 달리는 차들은 낯선 도시 외곽 버스정류장에 앉은 날 향해 미스트를 뿌려댔다. 작은 차는 괜찮은데 트럭이 지나가자 안개비 깊숙이 들어간 듯한 상황이 되었다. 안 되겠다 싶어 앉은 채로 우산을 펴 앞을 막았다. 다행히 조그만 삼단 우산을 가져와서 들고 있기에 그다지 힘이 들진 않았다. 5월의 중간, 보통 때 같으면 한창 따스할 봄인데 어쩐지 올해는 패딩점퍼를 입고 싶을 만큼 으쓸으쓸 하다. 자켓을 입고 나올까 망설이다 맨투맨티 하나만 입은 것을 후회했다. 마을버스는 24분이 지나서야 시야에 들어왔다. 역시 정류장 안내보다 네이버 지도가 정확해. 출근시간인 열 시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서 지각 걱정은 되지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도 그다지 지루하지 않았다. 어제 못 들은 ‘라디오 북클럽’에서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책 리뷰를 해주었고, 도로 위 전선에는 맞은편 산에 서식하는듯한 새들이 오락가락 한쪽 전선에 앉았다 다른 곳으로 옮겼다를 반복했다. 빨간 신호가 되어 차가 지나가지 않는 때에는 산의 경사면을 타고 내려온 공기로 제법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매일 반복되는 다급한 출근 행렬에서 벗어나 (버스가 오지 않아) 반강제적 여유로운 출근길이 나름의 기분전환이 되어 지친 몸과 마음을 움직여주는 작은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목적지까지는 채 5분이 걸리지 않지만 희뿌연 하늘 때문인지 꽤 많은 생각이 스쳐가 오랜 시간 버스 안에 있는 듯했다. 라디오에서 책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꽤 오래전, 고교 2학년 시절 문학 선생님이 생각나 긴 시간으로 느껴진 것도 같다.


그는 늘 흰색 면장갑을 끼고 수업에 들어왔다. 새까만 피부에 검버섯 가득한 얼굴과 손, 대머리는 아니지만 상당히 듬성듬성 머리가 나있는, 그마저도 직모인지라 두피가 훤히 보여 더 머리가 없어 보였던 키가 족히 180은 넘어 보이는 마른 체형의 노인. 쾡하고 다크서클 가득한 눈은 해골을 연상시켜서인지 눈이 마주치면 상당한 기운을 느끼곤 했다. 그가 주는 기운과는 상반되게 문학 시간은 수능 주요 교과 외로 평가받아 항상 0교시나 식사 후 5교시에 배정되어 모두가 잠을 자는 시간으로 활용했다. 그 역시 잠자는 학생들에 눈길을 주지 않고 자신의 수업을 이어갈 뿐, 모든 것에 초연한 말년 교사였다.


꽤나 자주 나는 그의 수업에 유일한 학생이었다. 자본주의적 효율을 몸에 새긴 이과반 학생들 중 비효율적으로 문학 따위에 자신의 힘을 쏟는 이는 드물었다. 그 시간에 자고 수학 시간에 힘과 정신을 모으는 것이 수능에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간에 홀로 허리를 펴고 있으면 조금 민망하기도 했던 것 같다. 누구도 듣지 않는 수업이었지만 종종 수업 중 그는 그냥 자기 얘기를 종종 했다. 아마 나 외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중 지금껏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그가 매달 월급 중 10만 원은 꼭 책을 사는 데 사용한다는 말이었다. 종종 문고본 전집을 수집한다고도 했던 것 같다. 모두가 잠든 중 난 홀로 감동받아 그를 우러러봤다.


그 후 종종 그때 그가 했던 말이 기억났고, 그럴 때마다 결심을 했다, 나도 직장을 가지면 매월 10만 원씩 내 서재를 채우겠다고. 막상 직장인이 되고 나니 책을 사려면 책을 보관할 자신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시린 현실을 맞이하고는 책을 모으는 것은 깔끔히 포기했지만 말이다. 그때만큼 문학을 사랑했던 시기가 내 인생에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어 조금은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간 떠오른 그때의 기억, 감정에 매일 출근하는 목적이 갑자기 생긴 듯 해 조금은, 아주 조금은 행복을 느꼈다.


월요일부터 내리는 비로 아침부터 다소 지쳤지만 늦은 버스 덕분에 답지 않은 과거 회상도 할 수 있는 좋은 출근길이었다. 종일 맴도는 말을 틈틈이 기록하며 또 엄청나게 소진되고 퇴근하는 지금까지도 이질적이었던 아침 버스정류장의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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