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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옹씨 Mar 09. 2023

비 내리는 밤

비 내리는 밤은 도로에 지나다니는 차도 몇 대 없는데 분주해 보인다. 바람인지 무언가가 젖은 아스팔트 표면을 건드리고 지나가 일렁인다. 눈 안에 채워진 모든 세상이 일렁이고 번진다. 춤추듯 조금씩 미세하게.


비 오는 날은 마음이 차분해진다. 맑은 대낮의 들뜸보다 비 오는 자정 무렵의 가라앉음에 더 마음이 간다. 끝도 없이 가라앉을 듯, 불안도 슬픔도 함께 가라앉아 이내 머리부터 가슴, 배까지 순차적으로 가라앉는 물리적인 느낌마저 드는 듯하다. 어딘가 4차원의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한 느낌도. 분류하자면 이런 건 나에게는 좋은 느낌 쪽이다. 만성 불안을 안고 사는 이들에게, 나에게 비 오는 날 밤거리를 보는 것은 제법 괜찮은 처방이라 생각한다.


밤, 어둠, 적막, 가라앉음의 정서가 어울리는 단어들에 길들여진 것은 아주아주 어릴 적부터인 것 같다. 다행히 이것들은 나에게 잘 맞는 옷이었나 보다. 지금도 여전히 난 해가진 후 어둠이 내린 골목길이라던지, 혹은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는 바닷길을 걸을 때, 물론 불안함도 느끼지만, 그보다는 더 편안하고 편안하다. 잡음이 사라진 주변, 그보다 내 속에 들끓는 잡음이 사라진 그 시간, 그 거리에 완전히 동화되면 나는 사라지고 배경만 남아 걱정도, 고민도 다 사라진다. 이대로 영원히 어둠 속 배경이 되어버려도 충분히 만족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가라앉음은 체념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 살아내는 과정은 체념할 수 없는 하루를 계속 이겨내는 일이다. 먹는 걸 체념하면 수일 내 죽는다. 사람 만나기를 체념하면 수일 내 우울에 빠진다. 일하기를 체념하면, 글쎄 이건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역시 곧 통장이 메말라 역시 죽는다. 죽음으로 가는 일은 인간에게 유일하게 1의 확률로 고정된 사건이다. 0.98, 0.99 이런 확률은 없다. 누구나 1이다. 어쩌면 죽음으로 가는 것이 삶의 가장 안정화된 상태가 되는 일이므로 삶은 체념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픔은 두렵지만 체념과 죽음은 그다지 두렵지 않다. 반드시 다가올 사건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어쩐지 지루해졌던 제주에 다시 가 밤바다를 거닐고 싶은 기분이 드는 2023년 초봄의 비 오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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