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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냥냥 Oct 18. 2024

비 오는 퇴근길 버스정류장에 앉아

지금은 멈췄어요 - thesomebodypain

시험을 치르고 나온다.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간다. 학교 안이라 신발을 신은 채로 덮었던 덧신을 빼려 허리를 숙인다. 저 멀리 현관문 끝으로 사람들의 발이 많이 보인다.


응?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이다. 여기는 성인들이 시험을 치르는 고사장. 아침 일곱 시에 맞춰 오기 위해 다섯 시에 일어나 걸음을 서두른다. 용산에서 1호선을 타고 구로역에서 수원역을 들르는 열차로 갈아타고, 또다시 내려 버스를 한차례 더 타서야 시험장에 도착할 수 있다. 도합 두 시간 십분. 시험장 앞엔 보호자의 차를 타고 온 수험생들로 북적인다. 어쩔 수 없지. 난 이방인이니 컨디션을 조절하거나 할 수 없다. 그저 어떻게든 제시간에 와서 남은 힘으로 또 어떻게든 시험을 치러내야 할 뿐. 가방에 챙겨 온 거라곤 필기구, 요약노트 두어 권, 작은 에너지바 두 개. 캔커피 하나가 전부. 한겨울이라 요란하게 각종 보온 장비를 챙겨 온 이들을 보니 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듯하다. 시험장에 난방이 틀어지고 있어 딱히 필요하지 않다. 평소에 산책하듯 생활비를 벌러 두 시간씩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풀어냈듯이 오늘도 다를 바 없다.


어쩐지 큰 이벤트 앞에서 긴장하지 못한다. 군입대나 고시를 치르는 지금 같은. 큰 일일수록 냉정하고 차분해진다. 오늘에서야 어쩔 수 없다는 체념 반, 믿음 반 채워진 상태로 일곱 시간을 보낸다. 과목별 시험이 끝날 때마다 아는 사람을 찾아 답을 맞혀보는 사람들을 피해 요약노트를 보는 건 학생 때나 지금이나 같다. 지나간 일엔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는다. 사람도 일도 시험도 마찬가지. 그때 할 수 있는 것을 했으면 그만이다.


1층 현관문을 나오니 레드카펫, 혹은 대통령 의전 행렬 같은 부모들의 군집이 사람 둘 지나갈 정도의 길을 만들고 양쪽으로 학교 밖까지 사람길을 만들어 놨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우와 하는 표정이 된 것만 같다. 아직 우리 아이인 수험생들이 내려와 각자의 가족을 만난다. 묘한 기분이다. 열여덟 수능 때 봤던 행렬을 열 해가 지난 성인이 되고서 또 마주한다. 세상은 변하기도 변하지 않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10년간 자란 건 나뿐인 듯 이상한 나라에 도달해 버린 느낌이 든다. 곧장 정문을 향해 사람들 사이를 지난다. 묘한 기분은 잠시. 돌아가는 길이 또 두 번 대중교통을 갈아타고 두 시간 넘게 가야 하니 한숨이 나온다. 시험은 아무래도 잊힌 것 같다. 남은 캔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오후 세시가 되도록 먹은 게 거의 없어 밥이라도 먹을까 하다 곧장 정류장을 향한다. 다음 주부터는 새로운 강의 일정이 있으니 주말 동안 쉴 틈은 없을 듯하다. 그래도 끊기지 않고 생활비를 벌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수원역을 향하는 버스가 도착한다.

퇴근길 비가 온다. 가을비다. 버스정류장에 앉는다. 오늘도 30분까지는 꼼짝없이 퇴근버스를 기다려야 할 듯하다. 정류장엔 오늘도 퇴근길을 마중하는 가족들이 나왔나 보다. 버스 정류장을 모조리 차지해 버릴 만큼 죽 밀려있고 더 차들이 몰려온다. 비도 오지 않았었는데 어쩐지 십 년 전 그날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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