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서를 위해 2005년 대표는 연단으로 올라와주세요. 대표, 한수진 판사. 아차, 오늘 발령 나는거니깐 지금부터 판사라고 불러도 되는거죠? 늘 덜렁거리던 연수원장이 결국 또 사고를 친다. 누구 앞길을 막을려고 임관도 전에 판사 호칭을 붙이는거야? 아무 잘못도 없이 시작부터 밑보이고 들어가겠네, 에효… 네! 올라갑니다! 어쩌겠는가, 일개 사법연수원생이 할 수 있는거라곤 그저 고등학교 학생들처럼 시키는 대로 나가고 가라는 곳으로 가는 것 뿐이니. 그래도 개운한 기분이다. 오늘로 탈출이다! 임명장을 왼손으로 받아들고 오른손을 내밀어 연수원장과 악수를 주고 받는다. 하하, 법원 가서눈 말썽피우지 말고 잘 해. 격려인지 칭찬인지 꾸지람인지 모랄 묘한 표정으로 건낸 인사를 받는다. 그럼요! 저 잘 하는거 아시잖아요? 괜히 수석이겠어요?! 으이구, 원장이 잠시 흘겨보다 손을 휙휙 저어 몰아내자 씩 웃고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이후로 지루한 식순이 몇개 더 남아 딴청을 피우고 있으려니 좀이 쑤신다. 수석이라… 공부야 늘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지금 난 굉장히 후련한 마음이다. 오래 자리잡고 없어지지 않고 있던 묵은 때, 음, 때라는 단어는 좀 미안하니깐 잊히지 않는 오래된 기억이라 풀어서 말하자. 그래. 누가 뭐라한 것도 아닌데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20년짜리 자격지심, 같은 비슷한것. 이미 성공궤도에 꽤 근접했던 발레를 결국 접게한 그 사건. 그 자식… 그 자식! 자식 자식 자식 자식… 헉! 일순 강당에 모인이들의 모든 시선이 한 점으로 꽂힌다. 앗차, 생각만 한다는게 입 밖으로, 그것도 복식호흡으로 우렁차게 나와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다. 자식 자식 자식 자식… 큭큭. 동기들은 다들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벌개져 있다. 자식 자식 자식… 흠. 한수진 판사는 군인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혹시 그 자식이 저는 아니죠? 하하하하. 아이고, 원장님, 당연히 아니죠. 태연하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얼굴이 화끈거려 자리 끝으로 머리를 처박는다. 멀었다 멀었어 정말.
수진, 누구야? 이렇게 좋은날 그정도로 크게 소리칠 정도면 인연이 아주 깊나봐. 혹시 숨겨둔 남자있니? 시은은 같은 조에서 2년을 함께 공부한 절친한 사이이. 야야, 우리 처지 뻔히 알면서 남자가 왠말이냐? 그니깐, 백년천년 공부만 했을것 같은 애가 무슨 원한이 그리 깊게 박혔어? 음, 원한이라 해야하나? 곰곰히 생각해보지만 잘 모르겠다. 뭐때문에 그랬는지. 나를 이정도로 바꿀만한 사건은 아니었는데, 그 별것아닌 발표시간. 얼굴이 새빨개졌으면서도 꾿꾿히 발표를 이어가던 그 자식, 아니 그 아이. 난 니가 꾸던 꿈이 됐어. 오늘, 바로 지금. 문득 궁금해진다. 넌 그래서 판사가 됐냐? 주위를 모두 하찮게 보던 그 눈빛, 남들은 몰랐겠지만 난 널 유심히 관찰했다고. 유치한 애들 장난엔 관심도 없는듯 조용히 책만 읽는 샌님으로 보였겠지만 난 니 중심을 간파하고 있었어. 궁금하다. 응? 뭐가 궁금해? 수진이 묻는다. 응, 바로 그 자식.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배고파 죽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