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정차역은 강남. 강남 역입니다. 선채로 눈을 감고 있다 눈을 살포시 뜬다. 눈을 감지 않으면 안된다. 이곳 서울 한복판. 아니. 지하 한복판에서 정신을 잃지 않으려면 눈을 감는 것이 가장 상식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어제도 지옥을 오르 내렸고 오늘도 지옥을 다시 오르내리고 있는 중이다. 지옥은 계속되어 내일도 모래도 한달 후도 일년 뒤도 이어질 예정이다. 오늘 날씨가 어떻다더라? 검색해보려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잊어버렸음을 깨닳는다. 뭐. 상관없다. 날이 맑든 비가 오든 그저 가면 될 뿐. 무슨 요일이든 지옥임은 변함 없다. 사람들에 밀려 에스컬레이터를 오른다. 제법 높은 층수를 단번에 오르는 에스컬레이터이지만 사람의 물결은 쉴틈 없이 흐른다. 물살을 거스를 수 없는 한명 역시 다리가 아픈걸 염두해 둘 틈 없이 다음 계단을 향해 다리를 움직인다. 하아… 한 숨 쉴 틈 없어 머릿속으로만 생각한다. 마침내 개찰구에 이르러 카드를 들이민다. 아직 지상은 나오지 않았다. 쉴 틈 없이 3번 출구를 향하는 계단길을 다시 오른다. 다리가 아프던가? 아직 생각할 겨를따위 사치다. 이곳. 서울은. 물살을 빠져나와 또다른 물살을 타고 거리를 걷는다. 이른 아침은 대체로 잿빛이다. 맑고 힘을 주는 아침을 아침으로 맞이할 수 있는건 아직 생각없이 하루를 온전히 낭비해도 되는 면죄부를 받은 이들. 아이. 학생. 재벌삼세정도. 물살은 작아져 각각의 건물로 빨려든다. 나 역시 하나의 콘크리트 건물로 자취를 감춘다. 햇님은, 있는지 없는지 상관없다, 의아할 것이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왜 가장 많은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시간에는 자취를 감추는지. 나를 싫어하나? 생각할지도.
점심시간이 지나자 청량한 하늘이 자그만 창 밖으로 펼쳐진다. 기후 변화 때문일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시퍼런 하늘. 강한 대비를 이루는 새하얀 뭉개구름. 지구에 발붙인 나의 시간일랑 일말의 상관도 없다는듯 느리게, 더 느리게, 어떻게든 더 천천히 가려하는 구름들의 행진. 잠시 눈을 쉬고 싶어 바라본 창 밖의 풍경은 지금 자그마한 빌딩 속 사무실에서 시간을 버리고 있는 나를 책망하는듯 인스타 쇼츠처럼 자극적으로 느껴진다. 잠시 급해진 손가락을, 아니 그보다 급해진 마음을 멈추고 느려터진 하얀 움직임에 속도를 맞춰본다. 지안님 하늘에 뭐가 있어요? 내 눈엔 구름밖에 안보이는데? 의뭉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민석. 혹시 지오님도 귀신봐요? 풋. 민석의 실없는 말이 하늘로 빨려들어가던 나를 땅에 붙든다. 귀신은 아니구요, 그냥… 음… 에이, 억지로 말할 필요는 없어요. 베시시 웃고는 금새 자신의 업무로 돌아간다. 지금은 초여름, 조금씩 더 뜨거워지는 지면을 매일 아침 달리 느끼고 있는 계절. 덥다. 더위를 잘 타는 체질이 아닌데 유독 덥게 느껴지는 이번해. 외피에 와닿는 공기도 더워졌지만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들게 느껴지는건 지금을 살아내는 일. 마음에 맞지 않는 직장에 계속 있는 것을 뜨거워지는 냄비 속에 있다고 심심치 않게 비유한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겠지. 대체 무엇을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는건지. 상념에 잠기려다 이내 정신을 다잡고 모니터로 초점을 맞춘다. 그래도 오늘 일은 오늘 끝내야겠지.
어느새 붉어진 하늘. 잠깐 모니터를 봤을 뿐인데. 수고하셨습니다. 작은 인사를 남긴채 틈바구니에서 몸을 빼낸다. 건물 문 앞을 나서자 그제야 숨이 트인다. 흐음. 짧게 쉼호흡을 한번 한다. 마음이 비워진 채 맞이하는 매일 저녁 일곱시. 어디로 가야하지? 어차피 좁다란 자취방에 가봐야 하루치 고요함, 데워진 공기정도만이 있을 뿐. 어디로 가야하지? 다리는 관성적으로 늘 가던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붉게 물든 하늘이 빙빙 돈다. 이런… 곤란하다. 이렇게 가다간 사고든 뭐든 크게 날 것 같다. 눈을 감고 길거리 한가운데 멈춰선다. 시각을 차단했는데도 하늘은 여전히 시선 위에 빙빙. 이제 와 후회한들 바뀌는건 없다. 평온하게 흘러가는 하루. 평온해지지 않는 마음. 툭. 악! 누군가 내 몸에 부딪혀 넘어진 것 같다. 줘기요오~ 돠들 가고 있는 길가에 엉? 혼자, 그렇게 서있으면 어떡해요오! 아직 이른 시간이란 생각은 이제 퇴근한 나만의 착각이었다. 이제 저녁 일곱시인데도 얼큰히 취한 목소리. 어쩐지 빙빙돌던 하늘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곧 잠잠해진다. 죄송합니다. 말을 먼저 한 뒤 쓰러진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전한다. 에이 씨, 얘 뭐야? 꾹 다문 입술이 줴~수없게 생긴게 꼭 지안이 같네? 네? 그 눈빛! 입술! 내 진즉 줴수없는 놈인지, 알고 있었어! 저 아세요? 응? 퍼뜩 정신이 돌아오는지 취객의 눈에 촛점이 돌아온다. 방금 재수없는 지안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네, 그런데요? 헉. 헉 소리를 입으로 직접 내는걸 보니 아직 술이 덜깬 상태가 분명하다. 너, 지안이? 사람 눈이 이렇게 커질 수 있는건가? 네. 제 이름이 지안이긴 합니다만. 와락! 취객이 두 팔로 숙인 고개를 잡아 끄는 통에 앞으로 쿠당탕 넘어진다. 아으… 괜찮으세요? 퇴근길에 바닥에 뒹굴고 있다니 이게 무슨 꼴인가. 손바닥이 아프다. 비릿한 피냄새가 올라오지만 무시하고 일단 상대가 괜찮은지 확인한다. 앗차 미안. 괜찮아? 나야 나! 수진이! 발레하던 수진이! 기억하지?! 수진이? 얼굴을 자세히 보니 기억속 얼굴이 보인다. 청평국민학교에 다니던 그시절 누구나 기억할 사람. 안변했네 역시 넌. 어정쩡한 자세로 바닥에 한쪽 팔을 집고 수진을 바라본다. 너 근데, 응? 일단 일어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왜? 너, 누워있어. 길바닥에. 아몰라. 퇴근길 가득한 사람들 사이로 미친 사람처럼 헤헤 웃으며 뒹굴거리는 수진. 우아하게 발레를 선보이던 스무해 전 그 사람은 아무래도 외모만 빼고 모두 사라졌나보다. 일단 폰 내놔! 목소리좀 줄이는게 좋을것 같은데… 아, 내놔봐. 아이폰을 꺼내자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맹수마냥 바로 낚아채간다. 010-3154… 자, 내 연락처. 받아. 으응. 모른척 하지 말고 내일 꼭 연락해라! 영감님, 이제 가실까요? 저희만 늦은 것 같은데. 일행의 부축을 받으며 멀어져가는 수진이 팔락팔락 계속 손을 흔든다. 홀린듯 멍하니 쳐다보다 퍼뜩 정신을 차린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음을 파악하고 서둘러 2호선 역을 향해 발걸음을 돌린다. 수진이? 피식. 간만에 미소짓는 스스로에 깜짝 놀라 서둘러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푹 숙인채 지하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