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나서다

by Hache

하고 싶은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없다.


서류를 제출한지 일주일, 특별한 감정의 변화가 없는 것은 담금질(?)의 기간이 그만큼 길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일 일것이다. 문을 나설 때 눈물까지는 아니어도 어떤, 평소와는 다른 드라마틱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또 그것도 아니었다. 여름의 정오무렵은 그저 일정할 뿐이었다. 햇살, 간간히 들리는 운동장 아이들의 외침, 정지한 공기의 흐름, 외진동네의 적막함, 모두 무슨 일 있었냐는 듯, 그저 평소와 같았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덕분에 차에 올라 돌아오는 길도 아무렇지 않았다.


말이 메말라 버렸으니 기록이라도 남겨보려 한다.


그들은 궁금하긴 했나보다. 올 해 바뀌게 되었다는 처음보는 관리자,


"그래서, 앞으로 뭘 하시려는 거에요? 저도 아들이 있어서..."


당신 자식뻘 나이의 사람이 정년과 연금 보장된 직장을 그만두고 나간다 하니 아들 생각이 절로 들었나 보다. 뭐, 그냥 예의상 할 말 없으니 툭 던진 것일 수도 있지. 그다지, 급변하는 사회와 단절되어 살아가는 고루한 이곳에 일주일 치 정도의 점심시간 가십거리를 주고 싶지 않아 그들이 아는 한정된 세계의 결론인 척, 거짓을 고했다.


"음... 그냥 대학원에서 하던 비슷한, 연구 일 쪽으로 가려구요."


의뭉스러운 눈초리의 그들도, 나도 그닥 할 말은 남아있지 않아 심플하게 인사하고 돌아서 나왔다. 올해는 배치가 어떻게 됐나 궁금해져 나오기 전 업무분장표를 봤다.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닌다는, 무표정한 얼굴로 매일 담당한 이들에 대한 욕을 하던 그녀도, 연금 때문에 10년만 버텨보겠다며 매일 고통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싸매던 그녀도, 담당했다는 이유만으로 매일 두 세 차례씩 보호자에게 쌍욕을 듣던 그녀도, 업무분장의 가장 어려운 자리 한 칸을 고스란히 차지하고 있었다. 매번 업무를 내팽개치고 자신의 안위만을 돌보러 2개월 씩 병가를 내 주변을 당혹시키던 쥐 같은 그는 역시나, 올해도 어려운 업무에서는 배제됐다.


'대단들 하시네'


뭐, 이제 나랑 관련된 일은 아니다.


지난 주말 읽은 뉴스기사가 생각났다. 전남의 한 시골마을, 초등학교 교실에서 점심시간 아이들이 밥을 먹으러 간 사이 자살했다는 한 사람의 이야기, 학교는 그 사람 개인의 문제일 뿐이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써져 있었다. 사람의 목숨이 사라진 일에 대해 참으로 그들다운 방어를 하고 있었다. 그깟 자리 하나 지켜보겠다고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그저 빠져나갈 궁리를 위해 회의실에 모여 머리를 싸메고 직원들 입단속 시켰을 그들이 눈에 훤했다. 벌레 같은 일을 일삼는 그들의 지위도, 그 조그마한 세상에서는 주변의 부러움과 자랑거리가 되겠지.


없던 기억으로 만들고 싶은데, 그래도 삶의 5년을 차지했던 기억인지라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분노도, 사그라들 듯 다시 불타오르고 이내 또 잠잠해짐을 반복한다. 어쨌든 벌레들의 세상은 영원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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