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세 번째 날

잡설

by Hache

드문드문 글을 다시 조금씩 쓰고 있다. 썼던 글을 다시 읽는 행위는 상당히 흥미롭다. 내 손에서 나온 글이지만 남의 얘기인 양 사뭇 재미있다.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무의미하게 지나치는 일상의 시간을 기록해 놓는 행위는, 또 그 안에 나를 심어놓는 행위는 기록의 또 다른 매체인 사진이 가지지 못하는 좀 더 길고 장황하고 아주 사적인 그런 설명하기 어려운 가치? 재미? 와 같은 것이 숨어있다. 딱히 글을 재미있게 쓰는 것도 아니고 또, 학창 시절에 일기나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성인이 된 후에 잠깐씩 적어 내려가는 속내는 무거운 마음을 상당히 후련하게 만들어주는 묘약이다. 상담원을 일 년가량 다녀보기도 했지만 개인적 견해로는 일기나 글이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는데 훨씬 좋은 효과를 보이는 듯하다. 물론, 상담 선생님과의 대화는 무척 즐거웠지만 말이다. 내 얘기만 너무 많이 해서 상담 선생님은 아마 지루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생애 가장 감정 기복 없는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 좋은 상태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새해에 무뎌졌다는 사실이 아, 나 이제 소워 꺾인 나이인가 보다 싶다. 벌써 이러면 안 되지만 그래도 벌써 세상 살이 별거 있나, 이것 저것 별 소용없더라, 네가 해봐야 조막만 한 걸음일 뿐이다, 발버둥 쳐봐야 사회의 그물은 상상했던 것보다 넓고 촘촘하고 그리고 깊다, 이번 판 망함, 과 같은 생각들이 즐비하다. 친구가 얘기해줬다.


“너 별거 아냐. 네가 뭘 하든 세상에 영향 없어.”


앞 뒤 잘라놓고 보니 비난하는 어투 같아 보이는데, 이 대화는 한 책을 함께 읽자며 그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중에 나온 말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아니 20대 후반까지는 사회문화 비평서를 좋아했다. 바이블처럼 여기고 밑줄을 긋고 공책에 정리하기도 했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시각, 답이라 생각했고 남들이 찾지 못한 아니, 찾으려 생각조차 못하는 사실들을 머릿속 깊숙이 넣어 놓으면, 마음 깊숙이 채워 놓으면 난 뭔가 이 사회의 부조리를 넘어 독야청청 자유로운 무언가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구속받지 않는 진정한 한 개인이 될 수 있을 줄 알았지. 그리고 얽매여 있는 타인들을 풀어줄 수 있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다 쓸모없더라. 그런데 그 쓸모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사회 운동가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 그저 스스로 만족하면 되는 것인데 말이지.


“이제 그런 책 읽어도 재미없어. 그냥 허무해.”


그래. 친구의 말처럼 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영향도 없으니 그저 책 읽는 잠시 즐거우면 된다.


꿈같은 건 이제 없는 것 같다. 그냥 조용하고 소소한 하루를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고 그냥 조용히 하루가 넘어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평생에 불가능한 바람이겠지. 평범함이 가장 힘들다는 말이 아주 뼈속 깊이 깨닫게 되는 2020년의 세 번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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