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묘사가 나노미터 단위로 너무도 잔잔하여 있는 힘껏 애써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 보지 않으면 그 감상의 폭이 아주 달라질 수 있는 소설. 오랜만에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었다.
에쿠니 라 함은, 고교시절 도서관에서 점심시간마다 읽으며 혼자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던 츠지 히토 나리와의, 같은 사건에 대해 남녀 각각의 시각이 담겼던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를 시작으로 ‘좌안’, ‘도쿄타워’, ‘울 준비는 되어 있다’까지, 순수의 시절을 보내던 고교생의 마음을 아름답게 물들여줬던 최애 작가 중 한 명이다. 공지영 씨를 제외하면 한 작가의 소설이 이렇게 긴 시간이 지나도록 손에 잡힌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음.. 한두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감상에 빠진다. 책 뒤, 옮긴이의 해석이 나왔지만 그만의 감상이니 한 문장 읽고 가벼이 덮어드렸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도우코, 도우코가 주는 이미지는 줄곧 한 사람을 연상되게 했다. 지독히도 이기적이게 보일 수도 있는 인물이다. 빛이 가득 따뜻하게 내리쬐는 평화로운 오후, 널어놓은 빨래가 마르는 냄새, 애정 하는 반려견과 함께 뜨끈하게 데워진 마룻바닥에 볼을 붙이고 엎드려 보내는 고요한 낮시간의 집안을 그녀는 가장 사랑한다. 그 장소, 그 평온한 시간을 위해 그녀는 사랑 없는 이와의 결혼생활은 감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후반에 자신을 강렬히 원하는 남자와의 관계를 이어가면서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며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쪽을 선택할 정도로 그녀에게 그 온기 가득한 적막의 마룻바닥이 중요했던 것이다.
휴직을 하고 있을 때 오전의 햇살과 사람들이 떠난 건물의 적막이 만들어내는 마음의 평온을 잠시나마 느껴봤던 터인지, 도우코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 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보다 고독일 수 있구나. 그것이 더 큰 평안을 준다면 말이지.’
주입된 도덕률로 선악을 판단하던 어린 시절이었다면 분개했을 도우코의 태도였겠지만, 어쩐지 지금은 무척이나 합리적이고 등장인물들 중 가장 가식이 없는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직시하고 삶을 적정선에서 컨트롤해가는 모습, 다른 인물들의 비교적 요동치는 감정선과는 대조적으로 심리적 흔들림 없이 일련의 상황들에 중심을 잡고 그저 차분하게 일상과 일탈을 넘나드는 모습은 자못 인간의 그것을 넘은 초인적인 모습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것이 무척이나 합리적인 태도라 합리성과 객관화를 좋아하는 나도 나이가 들면 그럴 수 있을 줄만 알았다.
읽는 동안에는 다른 인물들에 집중한 것 같은데 어쩐지 남겨진 생각을 곱씹다 보니 도우코만 남았다. 후기를 간략히 남기다 보니 문득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