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책장을 덮어야 할 때가 온 것을 알았다
나는 사랑에 있어 그렇게 착한 편이 아니었다. 조금만 수가 틀리면 헤어지자는 말을 불쑥 꺼내 들었고, 그러다 기분이 좋아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먼저 사과를 건네기도 했다. 누군가가 그랬다. 사랑할 때 가장 마지막에 꺼내야 하는 카드가 '이별'이라고. 아무렇게나 그 카드를 남발하면 분명 후회할 때가 올 거라는 경고였다. 나는 그 경고를 무시한 덕분에 호기롭게 먼저 꺼내든 이별 카드에 역으로 카운터 펀치를 맞곤 했다. 상대편이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그래, 헤어지자"라는 수긍을 했던 것이다.
사랑을 쉽게만 여겼기 때문일까. 그것보단 실은 나를 좀 더 봐달라는 투정이었을 것이다. 상대방도 그걸 아예 모르진 않았기에, 왜 그러느냐고 달래기도 하다가 종국에는 지쳐버린 채 그 카드를 받아든 것이리라. 20대 초반, 그럼에도 나는 두려운 것이 없었고, 버릇처럼 연애의 끝 무렵엔 늘 "헤어져!"를 입버릇 처럼 달고 살았다. 이 나쁜 습관을 고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또 한 번의 가슴 아픈 이별 덕분이었다. 덧없이 끝나고 마는 사랑의 마지막 장면에 서서 나는 되물었다. 이제 이별 없이 행복한 연애를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도대체 무엇을 바꿔야 할까? 나는 "헤어져"라는 말을 "사랑해"라는 말만큼 쉽게 꺼내는 내 버릇을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맞이할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참고, 또 참으리라. 상대방이 분명 잘못한 일이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보듬어 주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여덟 살이나 많은 남자와의 첫 만남은 맥주로 시작되었다. 그는 맥주는 맥주마다 꼭 맞는 잔에 따라서 마셔야 한다며, 홍대 놀이터까지 맥주잔을 들고 오는 특이한 정성을 갖춘 남자였다. 오빠보다는 아저씨라는 호칭이 더 잘 어울릴 만큼 나이 차이가 났지만, 그의 그런 고집이 꽤 마음에 들었다. 이후에 따로 몇 번 더 만나고 났을 때, 그는 내가 맘에 든다고 고백했다. 그런 그가 싫지 않았던 나는 그와의 연애를 시작했다.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는지는 몰라도, 그와의 연애는 초반부터 내가 참아야 하는 것투성이였다. 그는 나를 어느 날엔가 다른 여자의 이름으로 불렀다. 나는 아주 불쾌했지만, 다음번에는 그러지 말라는 말로 그 일을 덮었다. 핸드폰에 남겨진 옛 여자친구의 흔적들도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이해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오히려 그를 더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그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을 고민했고, 그를 채워줄 수 있는 것들에 관해 생각했다. 이 놀라운 변화 앞에 스스로 대견했던 것도 같다. 나는 나를 버리고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의 희열과 고통을 동시에 맛보았다.
수많은 편지를 써서 그에게 보냈고, 많은 대화를 통해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힘썼다. 그의 어두움은 깊었지만(그는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를 증오하고 있었고, 그만큼의 어두움이 그를 늘 따라다녔다), 나는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아니 뚜렷이 보더라도 그것을 감싸 안아주기 위해 더 없이 노력했다. 그 노력을 그도 알았을까. 잘 모르겠다. 언젠가 한 번, 내가 오빠에게 이렇게 많이 줄 수 있는 건 내가 여유가 많아서가 아니라, 사랑하기에 아주 노력하고 있는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그에게 얼마나 깊이 다가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갈등을 겪었다. 여타의 연애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예전만큼 쉽게 이별 카드를 꺼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나는 고통받았고, 나중에는 그 고통도 사랑의 일부일까 하는 고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노랫말처럼, 나는 점점 지쳐갔다. 나는 그에게 끝내 이별을 고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별 뒤에도 수차례 그를 다시 찾았다. 헤어진 이후 맞이한 그의 생일에 케이크를 들고 그를 찾았고, 술을 잔뜩 취해 그가 보고 싶을 때면 불쑥 그를 찾아가 놀라게 했다. 우리의 사랑은 내가 참은 그만큼 끝맺기 어려워져 있었다. 나는 그의 어두움을 온전히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가 나를 영원히 채워줄 수 없을 거란 것도 알았다. 그런데도 그를 계속 찾았던 것은 몹쓸 습관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와의 몇 번의 재회 끝에 이제는 정말로 끝을 내야 한다는 것을 예감했다. 그에게 '마지막'이라는 말을 뺀 채 만날 것을 제안했고,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거절하지 않았다. 마지막 저녁을 먹으며, 그는 마치 예전처럼 자신의 일상을 내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는 우리의 미지근한 사랑을 끝내야 함을, 사랑이 한 권의 책이라면 이제 책장을 덮어야 할 때가 온 것을 알았다. 그의 말을 끊고, 내가 말을 이었다.
"오빠, 내가 오늘 오빠를 만나자고 한 건, 이 이야기를 잘 끝내기 위해서야. 우리의 사랑이 한 권의 책이라면, 나는 계속해서 그 책을 붙잡고 덮지 못한 채 한참을 있었어. 하지만 이제는 다른 책을 꺼내볼 수 있을 것 같아. 그 다음 장이 백지일지라도, 나는 이번 장을 덮을 자신이 생겼어."
그는 묵묵히 내 말을 들었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꺼냈던 자신이 민망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그렇지 않았기를 바란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준비한 선물을 건네었고, 우리는 가벼운 포옹을 끝으로 '진짜' 헤어졌다.
자전거를 타고 멀어지는 그를 보면서, 나는 내 삶의 중요한 챕터 하나가 끝나고 있음을 알았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저 잘 견뎌내었다고, 충분히 사랑했고, 많이 자랄 수 있었다고, 스스로 오히려 대견해 했다. 그는 멀어져 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것이 나에 대한 원망이나, 더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은 아니었기를 바란다. 그보다 되려, 새로운 사랑을 맞이하기 위해 드디어 찾아온 공백이나 잘 마무리된 이야기의 끝으로 받아들였기를.
나는 그로 인해 사랑이 끝나더라도 상대방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별의 아픔에 취해 나 자신을 내팽개치는 몹쓸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었다. 씁쓸한 사랑의 끝이 아니라, 담백한 이별로 마음을 추스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 인생이 끝날 때까지 '그'를 좋은 책으로 추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건 내가 그만큼 좋은 사람이 되고 나서였음을 잊지 않을 것이다. 쉽게 이별을 내뱉지 않고, 끝까지 상대방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 그 마음이 나도, 상대방도 자라게 하는 사랑의 방법임을 오래도록 간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