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엄마가 그랬는데 나는 무려 4살 때 한글을 깨쳐서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고 했다. 나도 내가 천재이길 바랐지만 슬프게도 천재가 아니었다.
나는 우리 첫째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책육아를 했다. 그래서 한글 노출은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4살 때 깨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0세부터 7세까지 내내 책을 읽었는데 왜 소식이 없을까? 과거에 나는 첫째가 7세 즈음이 되면 진작에 한글을 깨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전히 깜깜무소식이다.
한글을 대하는 첫째에게서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책을 다 읽어 주는데 내가 왜 굳이 스스로 책을 읽어야 해?'
아.. 정말 이런 마인드 남편과 너무 똑같다. 효율쟁이인 남편은 무슨 일을 할 때도 자신의 노력을 최소한으로 하면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한다.
첫째도 그런 것 같았다.
책 읽는 것도 엄마가 해줄 수 있는데
내가 왜 굳이 읽히지도 않고,
머리를 써야 하는 책을,
내 에너지를 써가며 읽어야 하지?라는 느낌이 역력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첫째가 가장 와닿을 만한 방법으로 설명을 했다.
학교에 입학하면, 네 스스로 <화장실>을 찾아가야 하고 <양호실>도 찾아가야 하고, 학교 알림장에 써져 있는 내용을 적어 오기도 해야 해서 한글을 꼭 읽어야 한다고.
나는 진즉 기다리다 지쳐 첫째 6살부터 엄마표 학습지를 시작했고, 잠자리 독서 시간에 제목을 집어가며 읽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딱히 큰 진전이 없었다. 수학은 좋아하는 편이지만 언어 쪽은 첫째의 관심 밖이었다. 한글의 구조를 설명해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
돌파구를 찾지 못해 답답했던 무렵, 최근 읽은 <내향 육아>라는 책 내용 중 <벽보 부분>이 힌트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 우리 집에 붙어있던 벽보가 다 사라지고 없었다. 첫째가 자극받을 만한 한글 노출이 좀 부족했나 싶었다.
그래서 어딘가에 박혀있던 벽보를 꺼냈고 그 밖에 필요한 벽보를 구매해 여기저기 붙여놓았다.
신기하게도 벽보를 붙이고부터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어느 순간 벽보에 붙은 글씨를 첫째가 읽기 시작한 것이다.
"강... 원.. 도?" "서해?" "자. 강. 도" "러시아!" "유우~럽?" "엄마 여기 우리 이름이 있어" 하고 벽보에서 자신과 동생의 글자를 찾기도 했다.
서서히 책 제목을 보며 읽기 위한 시도를 했고, 간판을 보며 "엄마, 저기 '원'이 있어!" 외치기도 했다.
드디어 글자에 관. 심. 이 생겼다. 3월 2일에 벽보가 도착했으니 아직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변화가 생겼다. 괜히 아이들 교육으로 벽보가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 노출은 중요했다. 딱히 달라진 것 없이 벽보가 더 노출됐을 뿐이었지만 변화의 물결은 꽤 거셌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원하는 바가 있으면 종이에 적은 뒤 볼 수 있게 붙여놓으라고 했는데, 그 효과를 아이를 통해 경험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자격증 시험공부할 때도 노출을 많이 했던 기억이 있다. 중요한 내용을 포스트잇에 적어서 화장실이며 주방이며 곳곳에 붙여두고 외우고 또 외웠었다.
그것 역시 다 노출이었다.
이대로라면 상반기 안에 한글을 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보였다.
혹시 변화하고 싶은 게 있다면, 바꾸고 싶은 게 있다면, 변화의 물결이 지지부진하다면 노출을 더 해보자. 그러면 변화의 스위치에 또 다른 불이 켜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