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이제 아빠 없이 살 수 있나요?

by 은은한 온도

경찰이 등장하자 거리에서의 난리 끝이 났다. 아빠와 엄마는 파출소를 거쳐 경찰서로 이동했다. 아빠는 거리에서 뱉었던 말을 경찰에게 똑같이 반복했다. 마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엄마가 얼마나 형편없는 엄마인지, 신이 왜 이 여자를 때릴 수밖에 없었는지 아빠는 자신의 떳떳함 열렬히 주장했다. 쉼 없이 쏟아지는 아빠의 말들에 가로막힌 엄마의 말은 내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경찰은 아빠로부터 뽑아져 나온 빙산의 일각 같은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엄마는 기회를 보았다. 바다 밑에 잠겨있는 빙산의 거대한 밑동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야만 했다. 분위기는 점점 아빠 쪽으로 기울었다. 그만큼 아빠의 언변은 다른 이의 시선을 홀리기에 충분했고 본인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각한 아빠는 내 마음을 놓고 자리를 비웠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엄마는 짧은 시간 안에 경찰의 마음을 돌려야만 했다. 엄마는 아빠가 화장실에 간 사이를 틈타 경찰에게 깊숙이 잠겨있던 얼음산의 거대한 밑동 이야기를 냈다.


짧지만 강력한 이야기를 들은 경찰은 누구의 말이 진짜인지 란스러워 했다. 두 사람의 각기 다른 말만으로는 진위여부를 가릴 수 없었다. 경찰의 머리가 시시비비를 따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달랐다. 살다 보면 머리보다 마음이 한 발 앞서 움직일 때가 있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하는 일이지만 마음은 이미 자신이 할 일을 알고 있는 경우들도 많다. 경찰도 그러했던 것 같다. 경찰은 아빠 몰래 엄마에게 이 일을 종식시킬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알려주었다.


'100미터 접근금지'


사전적 말로 접근금지명령라 한다. 가해자가 피해자나 그의 가족, 주변인 등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있을 때, 법원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의 주거지나 직장 따위로부터 100미터 이내에 다가가는 일을 금지하는 명령이다.


엄마는 처음 듣는 이 제도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래, 이것이라면 번에는 제대로 아빠에게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엄마는 다시금 힘이 났다. 하지만 지금 이 경찰서 안에서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제도를 실행시키려면 무엇보다 아빠가 가정폭력을 일삼는 사내라는 것을 뒷받침할 증거가 필요했다. 경찰은 엄마에게 앞으로 맞을 때마다 사진을 찍어놓고,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받아놓으라고 했다. 음으로 엄마가 아빠에게 맞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경찰은 엄마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명함을 건네었다. 그리고 다음을 도모했다. 지금은 합의로 마무리한 뒤에 나중에 증거자료가 모아지면 이 사건까지 합쳐서 접근금지명령을 신청하자는 대안이었다.


그렇게 조서를 마치고 엄마와 아빠는 경찰서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미 밤은 깊어져 새벽녘이 되었다. 엄마는 두려움과 희망이 한데 섞인 오묘한 감정을 추스르며 나와 내 동생이 잠들어 있는 집으로 향했다. 너무나 고된 하루였다. 몸은 망신창이였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결연했다.


엄마는 쪽잠을 자고 회사에 출근했다. 점심은 먹지 않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지금처럼 온몸에 상흔이 적나라하게 남겨져 있을 때 의사에게 가야 했다. 마는 의사에게 전치 4주가 적힌 진단서를 았고 사진을 찍어놓은 것도 잊지 않았다.


머지않아 삼촌과도 연락이 닿았다. 다행히 삼촌은 숙모와 숙모의 친정집에 내려가 쉬고 있었다. 찍 연락을 주지 않은 점이 서운했지만 다치지 않고 무사한 것만으로도 엄마는 감사했다.


아빠는 자기 부인을 때려 경찰서까지 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탓에 더욱 대담해졌다. 띄엄띄엄 오던 발길은 더욱 잦아졌고 급기야 하룻밤 머물고 가기까지 했다.


아빠는 의처증에 강박증도 있는 사람이다. 청결에 대한 강박도 있는지라 가구 위에 쌓인 먼지 한 톨,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모두 아빠에게는 자극이었다. 그리고 그 자극은 아빠를 분노의 화신으로 변하게 하기 충분했고, 분노의 화신으로 변하는 날에는 그건 곧 엄마가 맞는다는 날을 의미했다.


엄마가 차 안에서 2시간 동안 맞아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고 목이 돌아가 움직이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또 아빠가 자고 가는 날이면 엄마는 다른 의미로 두려웠다. 혹시라도 집안에 숨겨두었던 진단서와 탄원서가 아빠의 손아귀에 들어가기라도 할까 봐 늘 가슴을 졸였다. 아빠는 촉이 좋은 데다가 엄마는 지독히도 거짓말을 못하는 여인이었기 때문에 증거가 노출된다면 다음을 기약하기는 힘들었다.


다행히도 그 집을 떠날 때까지 아빠에게 들키지 않았다. 그저 강하고 길게 맞는 날, 짧고 굵게 맞는 날, 강하고 굵게 맞는 날, 짧고 얕게 맞는 날들이 있을 뿐이었다. 맞은 날만큼 진단서도 쌓여갔다. 전치 2주, 전치 3주, 전치 4주가 2개, 전치 2주... 엄마는 숨죽여 기다렸다. 증거를 수집하는 일도, 증거를 숨기는 일도 그 모든 순간들이 위태롭고 숨이 멎을 만큼 긴장되었지만 아빠와 헤어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두려움도 맞설 수 있었다. 엄마는 가장 정확하고도 유일한,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회심의 일격을 가할 때까지 그저 아빠의 주먹 아래 납작 엎드려있었다.




아빠가 다시 찾아왔던 그 해는 밀레니엄이 도래하기 바로 직전이었던 1999년이었다. 세기말이라 그런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는 종말론이 떠돌고 있었다. 컴퓨터가 1999에서 2000을 인식하지 못하여 교통, 금융, 세무 등 업무 마비가 와 큰 혼선이 온다는 둥, 태양계가 일직선이 되어서 지구가 멸망한다는 둥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말이었지만 그땐 꽤나 그 소문을 믿었다. 그만큼 사람들도 세상도 모두가 혼란스러웠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붕괴되고, 국가부도도 왔으니 종말이라는 것도 어쩌면 올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에도 스며들고 있었던 것 같다.

1999년은 세상이 어지러웠던 만큼 우리 가족에게도 가장 혼란스러웠던 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초부터 계절을 거쳐 연말까지 울고 웃는 여러 굵직한 사건들이 내 기억 속에 선명한 자국들을 남겼다. 아빠 이외에도 내 기억에 새겨진 사건은 바로 내가 좋아했던 이모부의 죽음이었다.


이모부는 그 해 여름, 어느 날 갑자기 살고 있던 아파트 베란다에서 스스로 밖을 향해 날아가셨다.


작은 이모는 장례식 내내 정신을 잃고 쓰러져 먹지도 자지도 못했고, 7살의 동생과 그보다 더 어렸던 5살 동생은 검은색 상복을 입은 채 어 놀기 바빴다.


아빠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어서 인지, 나도 옥상에 오른 적이 있어서 인지, 가족의 죽음을 이렇게 가까이 접한 것은 처음이어서 그랬는지 나 또한 이모부의 장례식이 꽤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작은 이모의 시어머니는 넋이 나간 작은 이모에게 아들을 잡아먹은 년이라며 욕을 해댔다. 이따금 구급차가 작은 이모를 싣고 갔으며 흉흉한 죽음 앞에서 사람들도 용히 오고 갔다.


나 또한 장례식장에서 뛰어노는 사촌동생들을 보며 복잡한 심경이 들었었다. 세상에서 아비가 없다는 것의 의미도 모르고 하물며 죽음이라는 것의 개념조차 생기지 않았던 그 어린아이들을 두고 이모부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정말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


장례가 끝난 뒤 산에서 이모부의 무덤을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정말 긴 시간이었다. 깊은 구덩이 속에 관이 자리하고 정갈한 관위로 어른들이 돌아가면서 한 삽씩 흙을 뿌렸다. 이윽고 더 많은 흙이 뿌려지자 관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대로 이모부는 땅속 깊이 잠드신 것이다. 평평해진 땅 위에 네모난 흙더미가 벽돌처럼 쌓아 올려졌다. 집을 짓듯 동그랗게 봉분 했다. 산소 앞에서 우린 다 함께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제사 내내 검정 나비 한 마리가 우리 주변을 맴돌다 사라졌다.


그 지루하고 긴 시간 동안 나는 내내 친척동생들을 돌보았다. 산책도 가고 산에서 방아깨비도 잡고 풀 구경도 하고 도로에서 장난도 쳤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들 앞에서 차마 지도 못하고 착잡했던 기억이 난다.


작은 이모는 집으로 돌아가서 많이 힘들어했다. 모부가 살았고 죽었던 그 집에서 아이들과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작은 이모는 매일 술에 취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은 이모는 결국 이모네 집으로 엄마를 불렀다. 엄마도 동생이 안쓰럽고 걱정되었기 때문에 우리 세 모녀는 그렇게 그 해 10월, 작은 이모네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우리가 말도 없이 작은 이모네 집으로 오자, 아빠는 흥분하여 작은 이모네 집까지 찾아왔다. 다행히도 그 사이에 접근금지명령을 위한 서류 준비는 다 마쳐져 있었다. 5개의 진단서, 20여 장의 사진들, 엄마가 직접 쓴 10장의 진술서, 주변인들의 탄원서까지. 온갖 증거를 법원에 제출했고 엄마는 법원으로 출석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모네랑 함께 있었기 때문에 아빠는 엄마를 밖으로 빼돌릴 수가 없었다. 그 대신 계속해서 찾아와 이모와 엄마랑 주방 식탁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조용했던 대화는 이따금 큰 소리로 바뀌고 자기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을 때면 아빠의 폭언이 주방 가득 울려 퍼졌다. 미성년자가 있다는 것을 잊은듯한 각종 상스러운 욕들이 난무했고 급기야 이모부처럼 똑같이 하겠다는 상처의 말도 서슴지 않았다.


한 번은 아빠가 6인용 주방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쳐 그 위에 깔려있던 두껍고 둥그런 유리가 깨진 적이 있다. 아빠 주먹에 유리 파편들이 박혀있었고 찢어진 손에서 붉은 피가 팔꿈치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빠는 깨트린 것으로 끝나지 않고 깨진 유리조각들을 입에 넣고 씹어댔다. 굳게 다문 입안에서 와그작거리며 돌아다니는 유리조각의 소리가 내 귀에 생생히 들렸다. 동생들은 별안간 벌어진 이 상황에 다들 울고 있고, 이모와 엄마 또한 그 광경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너무 무서웠다. 무엇이 무서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섭다는 감정만이 내 안에 가득했다. 나는 유리를 씹고 있는 아빠게에 달려가 울면서 외쳤다.


"아빠! 제가 잘못했어요. 이러지 마세요. 제발 하지 마세요."


혹시라도 아빠를 붙잡으면 큰일이 날까 싶어 나는 아빠의 앞에 서서 두 손을 싹싹 빌어가며 아빠를 말렸다. 입안에 있던 유리조각들을 모두 뱉어낼 때까지 계속 울면서 아빠에게 사정을 했다. 아빠는 여느 때처럼 이모가 있을 때도 삼촌이 있을 때도 때론 교묘하게 때론 거칠게 엄마를 데려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드디어, 엄마와 아빠의 법원 출석날이 도래했다. 마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삼촌과 함께 법원에 갔다.


극악무도하다.


판사님이 법정에서 아빠에게 했던 말이다. 판사님은 엄마가 적은 진술서를 통해 엄마가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아빠를 만나 어떤 일들을 당하고 겪었는지 알고 계셨다. 꽃 같은 엄마가 어쩌다 아빠랑 결혼하게 되었는지, 내가 어릴 적 아빠가 엄마를 어떻게 했는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폭력이 오갔는지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인정해주셨다.


그날 거리에서 아빠에게 맞은 진단서와 2시간 동안 맞아 목이 돌아가고 온 몸에 멍 들었던 진단서는 근금지명령에 아주 중요한 작용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는 받아냈다.


접근금지명령을. 앞으로 아빠는 1년간 100미터 이내로 우리의 곁에 올 수 없다. 법원과 경찰 법적으로 우리를 지켜준다. 비록 1년이라는 짧은 기간 후에 어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법적으로 보호받는다는 사실 자체 만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엄마는 행복했다. 이제는 맘 편히 살 수 있겠구나 싶었다. 가난하더라도 콩 한쪽을 셋이 나누어 먹더라도 이렇게 셋이서만 살 수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아빠로부터 엄마의 인생이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1년이 지났을 때 나는 다시금 아빠가 우리를 찾아오진 않을까 겁이 났다. 하지만 1년은 2년이 되었고, 3년이 되었고 그대로 시간은 흘러 아빠를 다시 만날 때까지 10년이란 시간이 나갔다.


아빠는 아마 법적으로 대응했던 엄마에게 단단히 을 먹은 것 같았다. 엄마는 그날의 법정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아빠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조금 더 일찍 이 제도를 알았다면 엄마가 굳이 나와 내 동생을 떼놓고 집을 나갈 일도 없었겠지만 그때라도 아빠랑 헤어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한편 나는 늘 궁금했었다. 도대체 왜 엄마는 아빠랑 결혼했을까? 엄마는 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저 아빠가 첫 남자라 그랬어라는 말로 일갈했었다. 그리고 나중야 알았다. 엄마가 말했던 첫 남자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