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남자 친구는 몇 년 안에 안정적으로 보이는 공무원 직을 떠나겠다고 했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 죽을 때까지 들어오는 연금과 다양한 복지혜택을 버리고 자신은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공부를 끝내면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는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취업 후에도 나는 내 길이 안 보여서 막막한데,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과 목표로 하는 바가 굉장히 명확해 보여서 부러웠다.
'너를 보면 삶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 같아. 삶의 목표뿐만 아니라 직업적 목표도 굉장히 명확한 것 같아. 그걸 성취하기 위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너는 두려운 게 없어?'
'어떻게 없겠어. 나는 두려움에 좌절할 내가 가장 두려워. 내가 약해질까 봐. 나 자신이 나의 가장 큰 적이거든'
스스로가 가장 큰 자신의 적이라는 남자 친구의 말은 나의 허를 찔렀다. 내가 내 스스로를 가로 막고 있던 건 아닌지...
'이걸 하다가 잘 못 되면 어떡하지? 이 길로 가다가 다른 길로 가도 될까?'
애매모호한 위치에서 결정을 못 내리는 나를 보며, 남자 친구는 내가 너무 많이 생각하고 분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예측불가능한 미래를 예측하며 많은 것을 손에 쥐고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하다 보니, 하나도 못 잡고 있는 격이었다. 현재를 살기보다 미래를 살다보니 현재도 미래도 놓치고 있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두려움을 어떻게 관리하는 거지? 나는 나를 못 믿겠는데...' 불확실성,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관리하냐는 나의 질문에 남자 친구는 항상 자신의 큰 비전과 목표를 상기시킨다고 말했다. 선택의 순간과 어려움이 찾아올 때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를 떠올리면,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 어떻게 이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는지 좀 더 명확해진다고 말했다. 난 내가 뭘 원하는 지도 잘 모르겠는데, 대체 이런 명확한 자기 인지는 어떻게 길러진 걸까.
'너는 네가 원하는 게 분명한 것 같아. 어떻게 알아?'라고 묻는 질문에 남자 친구는 단호하게 경험이라 말했다.'미국에서는 학교 공부 외에도 다양한 운동, 체험학습, 대외활동을 하며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시간이 많아'. 특히 중학교 시절은 홈스쿨링으로 보낸 남자 친구는 책을 읽고, 몸을 쓰며 세상을 경험할 기회가 많았다고 했다. 그에겐 어릴 적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자신이 무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문득 나의 모든 학창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눈 앞에 펼쳐졌다. 학원 없이 자유로웠던 초등학교 시절을 빼고는 학교와 학원 그리고 입시 공부의 연속이었다. 대학을 가기 위해 늘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취업을 하기 위해 또 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사실, 책상 앞에 앉아있던 이유라도 명확했더라면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을 텐데, 큰 목표 없이 앉아만 있던 게 문제였다. 내가 나를 위한 프레임을 짜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원하는 틀 속에 나를 끼워맞추던 시간의 연속이었다.
'가장 위험한 조언은 경험해보지 못한 자들의 조언이라고 부시파일럿 저자 오현호씨가 말했어요. 우리는 경험을 통해 성장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직접적인 경험을 대학에 와서야 시작하죠. 왜냐하면 입시 공부해야 하니까요'. 지난 주 회사 일로 참가한 청소년 캠프에서 만난 강사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경험. 실제 내가 해보고 겪어보고 판단하는 것. 그리고 실행 그것이 바로 인생의 도전이자 학습이라 배웠다. 무수하진 않지만 어릴 적 경험하고 느꼈던 바들은 다 어디로 증발되었을까?책임의 무게가 한결 가벼웠던 어릴 적, 나는 생각보다 행동을 빠르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 살 한 살어른이 되는 중인 나는 행동하기보다 생각만 많아졌고, 행동은 느리다 못해 행하지도 못했다. 담대했던 아이가 더 소심해진 어른이 되는 걸 보면 나의 정신은 시간을 역행하는 것 같다. 어른스럽지 못하게. 좀 더 어릴 때 더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자기 탐구를 했다면, 더 용기있고 뿌리깊은 내가 되었을까?
캠프에서 만난 한 중학생 친구는 말했다.
'남들이 뭐라하든 여러분이 경험한 걸 믿고, 자신을 믿고 나아가세요. 우리는 다 다르잖아요. 결국 답은 내 안에 있어요. 저는 저대로 저를 아끼며 열심히 살테니, 여러분도 여러분을 아끼며 열심히 사세요!'
자신감에 찬 당당한 목소리. 그 친구의 발표 제목은 '나는 나대로 간다'였다.그 친구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벌써 자기와의 대화를 시작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