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영국에 간 지 벌써 5일째, 그가 선물하고 간 꽃다발과 메시지를 매일 다시금 읽어봅니다. 진심이 꾹꾹 담긴 메시지는 하루를 살아갈 힘을 줘요. 평생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몸엔 엔도르핀이 흐르는 게 느껴져요. 우리 호모사피엔스가 생존한 이유는 타인과 협업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뼛속 아니 뇌 속까지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가장 신뢰할 수 있고, 나의 연약함과 섬세하게 변화는 모든 감정,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을 나눌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신뢰가 깨질 뻔한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그 신뢰를 깨뜨리는 건 바로 제 마음속 걱정이더군요.
'한 사람을 평생 사랑한다는 게 가능하긴 할까?'
'그의 마음이 변하면 어떡하지? 그럼 그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내 마음이 변할 거라는 생각 대신 나를 향한 상대의 마음이 변할 것을 먼저 걱정하는 걸 보면, 참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방어적인 존재인 것 같아요.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우리 뇌 속엔 도파민이 흐르는데, 그 기간이 평균 3년이라고 해요.
'3년 후에도 지금처럼 서로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잘 살 수 있을까? 결혼을 하는 게 맞는 걸까..?'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다칠 것 같아 아팠어요. 이 역시 두려움이죠. 밤새 잠을 설치다 혼자 내 방에 들어와 휴지 한 통을 다 쓸 정도로 눈물 콧물을 쏙 뺀 적이 있어요. 로맨스 드라마의 실연당한 여주인공처럼.
다음 날, 하루 종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남자 친구에게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어떠한 불안함을 느꼈고, 어떤 것들을 걱정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결혼을 약속한 이상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 서로가 서로에게 애정과 신뢰가 필요한 경우 솔직하게 손을 내밀자고. 남자친구는 자신은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며, 우리는 지금처럼 잘 살아갈 거라며 제 두 손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 좋아하는 감정 그 이상이라 생각해요.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책임을 다하는 관계. 그는 제 걱정과 고민 깊숙이 깔려 있는 두려움을 함께 마주해 주었어요. '괜한 걱정하지 마'라는 가벼운 위로가 아니라, 잘 들어주고 자신은 내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결심했는지, 그의 두려움은 무엇인지 털어줌으로써. 서로의 넘치는 애정뿐만이 아니라 우리 정돈되지 않은 생각, 마음속 깊은 곳의 두려움을 나눌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사랑에 한 발 더 가 닿는 것 같아요.
에리히프롬은 '사랑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이 아닌 결의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라고 <사랑의 기술>에서 말합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다짐과 약속을 할 수 있을까?' 내 사랑의 무게를 고민하다, 상대를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일을 포기하지 말자 다짐합니다. 그 일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잇는 마음의 끈을 놓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그가 먼저 떠났다.
한국과 영국 이 두 나라를 이으며, 결혼을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다음 주면 영국으로 그와 그의 가족을 만나러 갑니다. 그의 고향에서 결혼 사진을 찍기로 했어요. 그가 살아온 시간과 장소를 담고 싶었습니다.새로운 우리의 챕터를 앞두고, 마음이 일렁입니다. 얼마 전 그와 저녁을 먹으며 약속했습니다.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살든 그와 나의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되, 그 어느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삶이라는 우주를 항해해 보자고. 그 항해길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닥칠 테지만, 나의 내면을 단단하게 세우고 서로에게 진심을 다하는 것만이 우리가 함께 탄 배를 타고,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일 거예요.
'2년이나 동거했는데 결혼하는 게 뭐가 다르기나 할까?' 궁금했는데 비로소 실감이 납니다. 마음. 마음이 참 달라요. 종이 한 장의 서류 위에 우리는 부부로 연을 맺는 게 아니라,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사랑, 책임, 신뢰를 약속하고, 서로를 삶이라는 우주를 함께 항해하기로 한 팀원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신중한 결의이자 판단이기에 책임이 따르는 것이죠.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가르쳐 준 사람과, 함께 불확실한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음에 감사합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이유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