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밝다. 눈 감아도 눈이 부시다. 너무 밝다. 점점 신경 쓰인다. 안 되겠어. 명상할 땐 방등을 꺼야지.
반려인에게 "라이터 있어?" 하니 “저기…” 행거 위 바지를 가리킨다. 결혼 전 담배를 끊은 그. 아직 라이터를 갖고 다닌다. 주로 내가 쓰는.
착- 다 써가는 밀랍초에 불꽃을 댄다. 심지가 짧나?불이 자꾸 고꾸라진다. 에잇, 신발장으로. 위쪽을 더듬어 작은 스탠드를 꺼냈다. 방바닥에 놓고 스위치 ON, 방등은 OFF. 제단이 살구색 볼터치처럼 따스한 빛으로 물든다.
명상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구루님들과 모든 종교의 성인들께 인사. 양손을 붙인 손끝을 이마에 댄다. 저녁 명상 시작. 침묵. 들숨 날숨을 바라본다. 개입하려 들지 말고 초연히. 눈을 감은 건 평소와 같은데 눈부심이 없어 한결 아늑하다. 거울 같은 내면 속으로 한 발 더 쑥 들어간 기분.
신경 쓰이는 요소가 적을수록 집중력은 상승한다. 감각의 자극은 생각을 촉발한다. 생각은 과거의 또 다른 생각을 부른다. 다른 일을 할 땐 미처 모르지만, 조용히 내면에 들어서면 가장 시끄러운 잡생각부터
들린다. 일정한 명상 루틴이 생기고부터는 어떻게 해야 더 깊어질까가 관건이 되는 이유다. 영혼 없는 사랑 고백, 머리로 하는 기도로는 어떤 진동도 일으킬 수 없으니까.
숨쉬는 존재가 스스로의 감각을 차단할 수 있을까?호흡이 필요 없는 신은 가능하다. 과학적 명상으로 신과 같이 되었을 때도 가능하리라 믿는다. 내면에 의식을 모아 완전한 멈춤을 얻는다면. 자신의 근원과 직접 대화할 수 있다면. 그 상태에서는 눈부심은 물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명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어둠이 필요하다. 물방울이 바다를 만날 때까지.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뿐만 아니라 물질적, 육체적 욕구에도 적절히 커튼을 내려야 할 까닭이 있다.
구조한 길고양이 뽀와 유기묘 너스 - 지난 1년간 집에서 그들과 살면서 대부분의 날에 거실 조명을 켜고 지냈다. 어두워도 홈캠 촬영이 되긴 하지만, 불을 끈 날 해프닝이 생길까봐. 쿠쿵! 하고 뽀가 에어컨 위로 점프하다 떨어진 날은 어떤 자세로 떨어진 건지 여러 번 봐도 불확실했다. 높은 곳에서 잘못 떨어졌으면 응급 상황인데 지켜볼 수밖에 없어 답답했다.
불을 켜고 가구 배치를 바꿨다. 캠도 3대로 늘려 상황이 나아졌다. 누가 자주 토하고 누가 똥스키(?)를 타는지 낱낱이 보였다. 하지만 백야도 아닌데 24시간 내내 불 켜진 집. 고양이들의 건강이 걱정됐다. 여태 집사들의 손을 타지 않는 것도 어쩌면. 안절부절 경계심이 너무 높은 것도 어쩌면… 꺼지지 않는 인공조명 때문은 아닐까? 일 년이 지났으면 출근할 때 불 끄고, 자기 전에도 불을 꺼볼 시점은 아닌지. 명상이 끝나고 녀석들의 얼굴을 보며 퍼뜩 든 생각이었다. 인간과 고양이는 다른 종의 동물이지만 함께 지구에 살도록 던져졌다. 왜일까.
"얘들아, 오늘부터는 불 끄자. 훨씬 편안해질 거야. 사랑해. 알지?"
밝음은 존재간의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지만, 어둠은 불명확하고 구분이 어렵게 만든다. 그러니 너무 밝지 않은 곳에서 우리는 지금보다 친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 자신과 내면의 우주를 서서히 합치는 데 포근한 어둠의 베일이 필요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