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사랑의 온도
"휴우우우..."
시골에 살고 싶다며 평택으로 이사한 시어머님(a.k.a. 서울토박이)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태도를 바꾸셨다. 너무 지루해, 여긴 할 일이 없어, 무서워서 혼자 못 다니겠어(아마도 인적이 드물고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셔서?) 등등.
일주일 중 하루인 휴일은 항상 어머님과 함께하며 종종 새로운 장소도 보여드린다. 물론 남편과 둘이서 보내고 싶지만 일종의 수행이라 여기며(난 요기니니까). 지난달에는 크리스마스의 교회처럼 화려한 조명이 가득한 카페에 갔다. 어머님이 주문하신 대추차는 진하고 맛이 좋아서, 한 모금 맛보니 '대추차 끓여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본래 대추에는 단맛이 있으니 설탕을 넣지 않고 대추고를 만들어보기로. 국산 건대추의 씨를 발라내려니 과육에 딱 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다(Tip: 하룻밤 불리면 훨씬 수월함). 분리한 씨들을 티백에 담아 먼저 끓이고(과육과 함께 끓여도 무방), 다시 과육을 넣어 달이는데 약 2시간. 물이 자작하게 졸았을 때 전체적으로 블렌더에 갈아 한 번 더 달여주었다.
건강에 유익한 물질이 농축되도록 약불에서 진하게, 더 진하게. 용암처럼 퍽, 또는 침(?)처럼 퉤!하고 예고 없이 튀면서 걸쭉해진 액체는 점성이 상당한 대추고가 됐다. 기호에 맞게 뜨거운 물을 붓고 씨앗류와 시나몬 등을 더해 마시면 숙면과 면역력에도 그만인 홈메이드 대추차 완성!
P.S. 무설탕 대추고는 냉장시 변질 우려가 있어, 소분해서 냉동보관하면 필요한 때 즐길 수 있다.
관계의 뜨겁지 않음을 못 견뎌하던 때가 있었다. 연인과는 자주 만나 애정을 확인하길 바랐고, 친구라면 늦게까지 놀거나 서로의 집에서 수다를 떨며 잠들 때 가장 행복했다. 소개팅 후 점잖게 메일만 오간다든지 연락을 했다 말았다 하는 관계는 별로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된다는 뜻이잖아. 만약을 위한 여지인가?‘
결혼, 이사 등의 소식을 알린 후로도 꾸준히 연락해오는 의외의 사람들 - 엄청 친하지도 그렇다고 친하지 않지도 않던 관계들 - 을 보며 내심 놀란 적도 많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만 누군가에게 선뜻 먼저 연락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더더욱. 예고 없이 매장으로 방문해 기쁨을 주는 이들을 보며 어쩌면 우정은 가장 고귀한 사랑의 형태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바라는 것 없이 서로 응원하는 마음이니까.
누군가를 위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강한 불만 줄곧 땐다면 금세 진이 다 빠지고 말 것이다. 잘해주고 싶던 마음은 어느 순간 의무가 되고, 재채기처럼 자연스럽던 애정 표현 대신 억지 고백을 짜내면서 서운해진다. 사랑하면 어떠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알 수 없는 명제에 자신과 상대를 대입시켜 서로를 옭아매기도 한다. 초조해진 마음은 처음 상대방을 만났을 때의 그것과 사뭇 달라져서 당신의 행복보다 나의 위태로움 - 사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 이 훨씬 중요해지는 순간도 많다.
자신과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부족할 때 우리는 숫자나 시간, 언어와 같은 관념에 한층 얽매이곤 한다. 상상 이상의 많은 방법으로 한낱 가소로운 경계들을 허물 수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지속 가능한 사랑은 활활 타오르는 이성적 끌림 하나만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서로를 강제하지 않고 비이기적으로 존중하는 태도, 즉 우정의 모습을 닮아갈수록 한층 자유롭고 성숙한 사랑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대추고를 달이듯 뭉근한 혹은 미지근한 사랑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다.
바싹 마른 마음부터 하룻밤 물에 불리자. 딱딱한 씨앗, 사랑에 대한 오래된 편견부터 발라낸다. 처음에는 센 불로 끓여서 순식간에 에고를 무장해제시키고, 잠시 후 약불로 바꾸어 한 번씩 뚜껑을 열어보며 은근히 달이자. 끓어 넘치지는 않는지, 바닥에 눌어붙어 타진 않는지 관심을 기울이면서. 나를 바라보지 않는 것 같지만 실은 어디에서나 보는 이처럼 너무 티나지 않게.
약간 무심한 척, 부담스럽지 않은 온도에서 사랑의 맛과 향은 점차 깊어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