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샤워를 하다 노푸를 결심했다
숱 많은 반곱슬에 대부분의 인생을 긴 머리로 지내왔다면, 누구든 나처럼 머리 감기를 싫어하리라고 믿는다. 밥을 먹거나 똥을 싸는 일에 비해 머리를 감는 데서 오는 쾌감은 그리 크지도 않다.
길이감 있는 머리카락을 제대로 씻어내기 위해서는 허리와 고개를 앞으로 숙인 채 칭칭 엉겨 붙는 모발과 두피를 구석구석 열심히 문질러야 한다. 그런 다음 린스나 트리트먼트를 바른 채 몸과 얼굴을 씻고, 끝나면 머리를 헹궈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다. 그때쯤이면 몸에서도 머리에서도 열기가 올라오고 습해진 욕실에서 빨리 탈출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나와서 빨리 드라이를 하지 않으면 두피는 이내 가려움증을 일으킨다. 가만히 있어도 더운데 드라이어를 꼭 써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1시간을 말려도 바짝 마르지 않는 두피를 모른 체하고 잠들었다가는 가려움, 냄새, 비듬으로 고생할 게 뻔하다. 뜨거운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으면 시끄럽기도 하거니와 내 머리와 얼굴에 있는 게 물인지 땀인지 헷갈리기 시작하고... 아, 그냥 다시 씻어야 하나?
'노푸(No Shampoo)' 이야기를 들은 건 십수 년도 넘은 일이지만 몇 번 시도하려다가 말았다. 그땐 샴푸 하지 않는 걸 상상하기 어려워서 린스부터 대체하려고 했다. 먹을 수 있는 자연의 재료를 머리에 바르고 싶어서 린스 대신 식초물이나 달걀팩을 발랐는데 번거롭기도 하고 냄새와 느낌, 효과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비교적 순한 성분의 샴푸와 린스를 사용하면서 최대한 띄엄띄엄 머리를 감았다. 3일에 한 번 정도? 미용실은 머리를 감아야 하는 날에 맞춰서 갔는데, 단골이 될지 말지의 기준은 얼마나 머리를 시원하게 감겨주시는가-였다(고생하신 미용사 분들께 진심으로 고맙다).
비건과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기 시작하면서 '고체형' 샴푸에 입문했다. 무코팅 종이에 포장되어 나오는, 자극이 덜한 약산성 샴푸바를 쓰면 버려지는 플라스틱 용기와 액체 샴푸 속 방부제와는 안녕이다. 샴푸바를 쓰면서 언젠가부터 5일 이상 머리를 감지 않아도 그다지 찝찝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 무렵 헤나 염색도 집에서 직접 하기 시작했는데, 매달 뿌리 염색을 하러 미용실에 갈 때마다 두피가 따갑고 화끈거렸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정수리 앞쪽에 새치가 자랐고 그게 부끄러워서 하나둘 뽑다 보니 지금도 부분 탈모가 남아있다. 대학생이 되고부터 죽 염색을 했는데, 두피에 있는 10만 개의 모공으로 거의 매달 유해 화학물질을 흡수시키는 건 정말이지 몹쓸 짓이었다. 그에 비해 유기농 헤나 가루를 마요네즈 농도로 물에 개어서 은은한 풀향기를 느끼며 바르고, 2시간 후 씻어내는 방법은 얼마나 건강하고도 경제적인지. 헤나를 시작하고부터 두피가 맑아져서인지 머리 감는 주기를 무려 7일까지 늘려도 별 문제가 없었다.
보통 머리를 감으면서 샤워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샤워 주기도 길어졌는데, 씻고 말리려면 몇 시간씩 걸리는 머리는 수건으로 싸놓고 샤워만 할 때도 많았다. 그럴 때 샤워를 빨리 끝내지 않으면, 수건 속으로 습기가 차올라 머리까지 감아야 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어느 날 샤워에 관한 흥미로운 글을 읽었는데 피부 및 비뇨기과 전문의 옐 아들러(Yael Adler) 박사가 쓴 <은밀한 몸>(배명자 옮김)이라는 책에서였다.
샤워를 매일 하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 하지만 샤워를 반드시 매일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아니, 매일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몇 주 동안 샤워를 하지 않았더니, 피부에 병균이 늘기는커녕 오히려 사라졌던 좋은 박테리아, 예를 들어 천식과 습진을 막아주는 박테리아가 다시 돌아왔다. (중략) 비누로 씻으면, 우리를 보호하는 유분이 씻겨 내려가 피부가 건조해진다. 알칼리성 비누를 사용하면 산성 보호막이 알칼리성으로 바뀌고, 다시 산성으로 바뀌기까지 최대 여덟 시간이 걸린다. 가련한 피부가 보호막 농도를 pH10에서 다시 pH5로 내리려면 그만큼 긴 시간이 필요하고, 산성을 좋아하는 피부 박테리아 보초병은 그 시간 동안 전투력을 잃는다. 바이러스, 병균, 해로운 박테리아 등 온갖 병원체들이 신나서 달려든다. 천연비누라고 다르지 않다. (중략) 방어를 담당하는 모든 신체 부위는 산성(pH7이하)이다. 피부는 5, 질은 4, 위는 1.5 그리고 대장은 6이다. 그러니 매일 샤워를 하되 비누 없이 물로만 해라.
'비누 없이 물로만 씻으면 피부가 오히려 건강해진다는 얘기잖아? 샤워 시간도 단축되고.'
궁금해진 나는 그날 당장 물로만 씻어보기로 했다. 바디 타월도 비누도 없이, 그저 샤워기로 미온수를 끼얹으며 손으로 가볍게 몸을 문질렀다. 한 3분이나 걸렸을까?
좋아하는 광목 수건으로 톡톡 두드려 물기를 흡수시켰다. 평소처럼 머릿속까지 습기가 차지도 않고, 제법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오오, 이거 괜찮은데.
물로만 샤워해도 괜찮다고 인식하자 땀을 많이 흘린 날만 가볍게 비누칠을 하고, 다른 날은 물로만 씻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두 달 넘게 지속해도 피부에 별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씻은 직후 무언가 바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건조감도 조금씩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물로만 샤워를 할 수 있다면, 머리도 물로만 감을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써온 약산성 샴푸바들의 전성분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았다. 소듐코코일이세티오네이트, 데실글루코사이드, 라우릴베타인, 소듐코코일애플아미노산... 친환경이라는 샴푸바들도 이런 낯설고 복잡한 단어들을 몇 가지씩은 표기하고 있다. 대체로 천연유래성분이라 합성계면활성제보다는 안전한 편이지만 결국은 피부의 방어막을 무너뜨리는, 계면활성제들. 이런 성분을 두피에 계속 문지르는 행위가 '괜찮을' 리 없을 것 같았다.